지겹다. 진짜.
휴일만 되면 일찍 일어나는 아들 덕분에 오늘도 7시 조금 넘어 일어났다. 신발장 구석에 넣어 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국기를 게양했다. 우리 집은 13층이라 태극기가 바람에 날려갈까 봐 테이프로 고정을 해 두었다.
오늘은 남편과 건강 달리기를 하러 가기로 한 날이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옷을 갈아입었다. 남편은 샤워를 마치고는 밑에 헬스장에 좀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사이 나는 밥 먹은 것을 치우고 양말을 신고 선크림을 얼굴 가득 발랐다. 헬스장에 다녀온 남편은 헬스장에서 신던 운동화를 들고 올라왔다.
“아니, 그걸 왜 들고 와?”
“이거 신고 가려고.”
“헬스장 신발은 실내용이잖아. 그걸 신고 나가면 어떻게?”
“내 마음이야.”
“아니, 밖에 신고 나가면 바닥이 더러워지잖아.”
“내가 뭐 진흙탕에 들어가? 갔다 와서 물로 다시 깨끗이 닦을 거라고.”
아니, 운동화가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마라톤 대회가 아니에요. 건강 걷기 대회라고요. 더 싸울 힘이 없어서 포기했습니다.
여기서 끝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왜 이런 날 또 싸움은 길어지는지. 두 번째는 현관문 앞에 놓아둔 종이상자가 문제였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이거 가져가서 버리자!”
“안돼, 비 오면 그거 박스 젖어!”
“그럼 분리 수거장에 박스 가득 있는 거는 뭐야!”
“그래도, 오늘 안 버리고 휴일 지나고 버리고 싶어”
“그때 나보고 버려달라고 하지 마라.”
“알겠다고. 당신은 음식물 쓰레기나 잘 버려줘!”
“뭐? 내가 음식물 쓰레기 언제 안 버려준 적 있어? 왜 시비야?”
대화 전개 살벌하지 않나요? 항상 대화는 제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일단 저희 아파트 종이상자 수거장은 지붕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가급적 비가 오지 않는 날에 버리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수거해 가시는 분도 좀 더 편할 것 같아서요. 근데 남편은 제가 이상한가 봅니다. 이걸로 이 아침에 싸울 일입니까?
차에 탔지만 진짜 다시 내려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여보, 나 그냥 오늘 집에 있을까? 당신 혼자 다녀올래?”
“..........”
남편이 여기서 몇 마디만 더 했다면 분명 오늘 걷기 대회는 안 갔을 겁니다. 휴~
행사장 근처 초등학교 주차장에 주차했습니다. 식전 행사에 3.1 운동 기념식까지 마치고 실제로 걷기 대회는 10시 30분이 넘어야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8시 30분쯤이었는데 벌써 사람들이 많이 와서 깜짝 놀랐네요. 무료 음료 나눔을 하는 커피차에 가서 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고 자리를 잡고 기다렸습니다. 기나긴 식전 행사를 마무리하고 3.1절 노래 제창에 만세삼창까지 마치고 드디어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남강변을 따라 평지를 걷는 코스여서 크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반환점에서 경품 추첨권을 넣고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오니 11시 50분쯤이었습니다. 돌아와서 참가 기념품 텀블러(또 텀블러)를 수령하고 마지막 경품 추첨을 기다렸습니다. 사전 경품 추천 번호를 주최 측에서 뽑아 놓았는데 남편과 저는 없었네요. 마지막으로 공기청정기, 제습기, 스마트 워치, 갤럭시탭은 현장에서 바로 추첨했습니다. 제가 노리는 물건은 딱 하나 갤럭시탭이었습니다. 그걸로 디지털드로잉을 하고 싶었거든요. 오늘 사전 참가 신청자만 2000명이었습니다. 갤럭시탭에 내가 뽑힐 확률은 1/2000인데요. 역시 신은 저를 버리셨네요. 상대적 박탈감을 심하게 느끼며 차에 올라탔습니다. 휴~ 허기가 몰려옵니다.
미리 가기로 정해둔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이곳은 남편과 제가 연애 시절 밥을 먹으러 간 곳입니다. 벌써 15년이 흘렀습니다. 최근에 뭔가 특별한 것도 없는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진짜 오랜만에 가본 곳인데 가게 내부는 별로 바뀐 게 없었습니다. 김치찌개 2인분을 시켰습니다. 십여 가지 반찬과 밥 그리고 김치찌개가 나왔습니다. 보리밥에 반찬들을 골고루 올리고 달걀부침에 김 가루까지 뿌리고 비빔밥 소스를 한 바퀴 둘러서 밥을 비볐습니다. 비빔밥이 자극적이지 않아서 김치찌개랑 먹기 딱 좋았습니다. 계산하면서 사장님께 물어보니 할머니께서는 연세가 많으셔서 장사를 하지 않으시고 자기가 대신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그분이 따님인지 며느리인지는 모르겠네요.
사장님께 15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고 말씀드렸더니 반가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맛있게 먹었는지 물어봐 주시고 다음에도 또 오라고 인사해 주셨어요. 근데 말이죠.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할 걸 그랬어요. 옛날 그 맛이 안 났어요. 그 당시 할머니께서는 나물도 접시 가득 담아주시고 김치찌개도 냄비 넘치게 끓여주셨던 것 같은데 이번에 갔을 때는 빈약한 반찬 양에 실망을 했습니다. 할머니 손맛 가득하던 그 나물 맛도 아니었습니다. 심심한데 건강한 맛.
돌아오는 차에서 생각했습니다. 15년 사이 주인장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음식 맛이 변했습니다. 15년 전의 우리는 지금도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도 변했나 봅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15년 전의 우리는 어디로 간 걸까요? 내 옆자리 남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