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Jan 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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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과 사이폰 커피, 에티오피아
며칠째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골목골목을 채우고, 사람들은 두꺼운 방한복에 몸을 숨긴 채 잔뜩 웅크린다. 머플러 끝자락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고개는 자라목처럼 움츠러든다. 겨울은 이렇게 사람의 몸과 마음을 작게 만든다. 거리의 사람들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숨소리조차 하얗게 얼어붙은 듯하다.
그런 날이면 종종 찾게 되는 교외 고즈넉한 '카페 스가모'가 있다. 낡은 나무문을 밀고 들어서면,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문틈으로 스며들 새도 없이 따뜻한 온기가 감돈다. 창가에 앉아 가만히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창밖에는 사람들이 바삐 오가지만, 이곳은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쇼팽의 피아노 선율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싼다. 그 음률은 겨울의 쓸쓸함을 조용히 다독이며, 차갑게 얼어붙은 감정을 녹여준다.
'싸이폰 에티오피아 드립커피' 한 잔이 테이블 위에 놓인다. 따스한 김이 올라오고,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진하고 깊은 맛이 입 안을 채운다. 쓴맛 뒤에 은은하게 퍼지는 단맛은 마치 겨울 속에서 발견한 작은 위로 같다. 손끝으로 펜을 잡고 천천히 글을 쓴다. 글자는 조금씩 종이 위에 내려앉고, 마음속 이야기들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나만의 조용한 고백 같은 문장들이다.
오늘은 어쩐지 호사스러운 날이다.
차가운 겨울 한복판에서 따스함을 누릴 수 있는 것, 음악과 커피와 글이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는다. 이토록 간소한 호사가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이 작은 공간에서만큼은 세상과 단절된 듯 평온하다.
밖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하게 데워진다. 겨울날의 이런 고요함이 있어 우리는 다시 걸어갈 힘을 얻는지도 모른다.
다시 바람 속으로 나아간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