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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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 따라온 인연, 뒷걸음질로 다가온 사랑
김상문
79년 7월 어느 날이라잉. 우리 집안 아짐이 되시는 분이 완도에 몇 해를 자주 다니셨제. 그러더니 완도 아가씨를 하나 중매를 서볼라고 나섰단 말이여. 헌디, 아가씨네 쪽에서 전해지는 말이 저녁 9시 막차로 와달라 하더라고. 그래서 해남에서 저녁 7시 차를 타고 내려갔제.
그 아가씨네 집이 중매 선 본 분네 집을 지나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야 하는디, 이 날 바닷바람을 어찌나 온몸으로 맞았는지. 여름 태풍이 왔는가 싶게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는 무서운 정도로 높더라고. 허지만 첫선을 보러 간 마음은 들떴어라. 그렇게 중매 선 본 분네 집에 도착했는디, 조금 있으니 아가씨 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마음을 가다듬고 옷깃을 여미고 있었제.
헌디 말이여, 이 아가씨가 뒷걸음질로 들어오더만. 얼굴을 도통 볼 수가 없으니 불안하잖여. '혹시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라 했는가?' 싶고, '곰보 아녀?' 하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 그래서 내가 일부러 말했제. '아가씨, 물 한 그릇 주실라우?' 하문서. 그랬더니 물을 떠가지고 오는데도 또 뒷걸음질로 들어오는 거라.
그때 생각이 참 많이 들었어라. 읍내 다방에서 친구들이랑 차 한 잔 마시며 했던 얘기가 생각났제. '사람 얼굴을 보면서 대화해야 그 사람 마음을 알 수 있다' 했는디, 이 아가씨는 얼굴을 보여주질 않더라고.
'아니, 내가 어디 얼굴이 못생겼단가?'
'키가 작기를 한가?'
'아니면 폼 안 나게 하고 왔는가?'
'그래도 우리 섬 처녀들보단 낫지 않겄는가?' 하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제.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이 아가씨 앞머리를 살짝 젖혀봤제. 그랬더니 얼굴이 괜찮더만. 그래서 내가 '요즘 아가씨답지 않구만요잉' 하고 말을 던졌는디, 이 아가씨가 '아가씨도 아가씨 나름이제' 하더라고. 어찌나 우습던지 그 한마디에 마음이 딱 통했구나 싶었제.
근디 말이여, 갑자기 아가씨가 벌떡 일어서더만 밖으로 나가면서 뒤통수로 한 마디 툭 던지는 거 있잖여. '사진 있으면 하나 주실라우?' 허허, 내가 가져간 독사진이랑 친구들이랑 찍은 사진 두 장을 줬는디, 이 아가씨가 두 번 찍힌 친구를 나로 착각했는가 보더라고. 그리곤 '있다가 다시 오쇼잉' 하더만.
밤 12시가 다 돼서 다시 갔는디, 아가씨네 집에 어르신 열 분이나 모여 계시더라고. 내가 인사를 드리니, 어르신들이 맥주 한 상에 안주를 쫙 펴시더라고. 그렇게 철석철석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견우와 직녀처럼 첫인연이 시작됐어라.
그리고 딱 십삼일 뒤, 8월 9일이었제. 읍내 식당에서 양가 어른 스무 분을 모시고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약혼식을 올렸단 말이여. 허지만, 세상일이 꼭 행복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 호사다마라더니, 우리한테 행복한 시작을 만들어주셨던 장모님이 삼 개월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제.
지금도 그 장모님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혀. '우리 사위 왔는가?' 하시면서 손수 밥을 지어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해라. 그리운 장모님 생각날 땐, 내 옆에 있는 아내 얼굴을 바라보곤 해. 그때 그 아가씨가 이젠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 있더라고.
허허, 세월이라는 게 참 묘허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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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청람문학회 정용애 작가의
남편인 김상문 선생님께서
보내온 연애ㆍ결혼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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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 글을 읽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따뜻한 웃음과 함께 묵직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글쓴이의 생생한 표현과 유쾌한 해학, 그리고 잔잔한 그리움까지 고스란히 전해져서 글 한 편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졌습니다.
먼저 태풍 바람을 뚫고 완도로 향하던 그날의 긴장감과 설렘, 그리고 첫선을 보는 순간의 소소한 해프닝들이 너무나 실감나게 느껴졌습니다. 뒷걸음질로 들어오던 아가씨의 수줍음과 글쓴이의 속마음 독백은 정말 사람을 미소 짓게 하더군요. "곰보가 아닌가?" 하며 불안해하다가도, "섬처녀보단 낫지 않겠는가"라는 솔직한 속내는 인간미가 넘쳤습니다.
특히 아가씨와의 짧은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풋풋한 설렘과 마음이 통하는 순간은 마치 제 옆에서 누군가 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자연스럽고 따뜻했습니다. "아가씨도 아가씨 나름이지요"라는 한 마디가 가진 힘은 단순히 유머를 넘어 두 사람이 인연으로 엮이게 되는 결정적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날 밤 철석이는 파도소리와 함께 시작된 인연이 십삼일 만에 약혼식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에서는 인생의 아름다운 우연이 얼마나 큰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행복 뒤 찾아온 장모님의 이른 작별 소식은 저 역시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손수 밥을 지어주시며 사위 사랑을 아낌없이 보여주셨던 장모님의 모습은 글쓴이의 그리움 속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신 그 아가씨와 함께 세월을 보내고 계신 모습이 참 아름답고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삶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긴 이 이야기가 저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파도소리와 바닷바람 속에서 시작된 인연은 단순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 세월의 깊이를 담은 삶의 진솔한 기록이자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이 글을 통해 그 시절의 정감 넘치는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변치 않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따뜻하고 해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담아 많은 이들과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