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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끝으로 그리던 꿈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Mar 24. 2025





   


            발끝으로 그리던 꿈





어릴 적

내 짝꿍 서연이의 꿈은 발레리나였다.

그는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왔다.

피부는 옥빛이었고 눈은 사슴눈처럼 깊고 맑았다.

그는 쉬는 시간이면 책상 사이를 빙글빙글 돌았고, 숙제를 마친 뒤엔 손끝으로 바이올린을 흉내 내며 말하곤 했다. “짠짠 찐찐, 지금부터 공연 시작이야!” 두 팔을 활짝 펼치는 순간, 교실은 그녀만의 무대가 되었다. 연필이 종이를 긋는 소리조차 반주처럼 들리던 그 시절, 나는 언제나 조용한 관객이었고, 서연이는 중심을 잃지 않는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작디작은 발끝으로 공중을 밀어내듯 회전하던 몸짓은 마치 무중력의 세계를 유영하는 듯했다.

그때는 몰랐다.
발끝으로 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내와 고통이 필요한지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피멍이 드는 발가락, 땀에 젖은 토슈즈, 단정한 동작 이면에 숨어 있는 고된 훈련과 끈질긴 의지. 서연이 역시 결국 발레 학원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가정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고, 부모님은 보다 현실적인 삶을 원하셨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 이상 무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그림을 그렸다. 종이 위에는 뺨이 붉은 무희들, 팔을 뻗은 소녀들, 허공에 머문 듯한 움직임들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그 그림들이 다시 떠오른 건, 훗날 에드가 드가의 화폭을 마주했을 때였다. 인상주의 화가들 가운데에서도 드가는 유독 무희들을 즐겨 그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공연의 찬란한 순간보다는, 그 이면의 고요한 틈에 머물렀다. 숨을 고르는 자세, 지친 어깨선, 구부러진 발끝—그가 그린 것은 연습실의 공기, 무대 뒤편의 침묵이었다. 번지는 듯한 색감, 섬세한 붓질, 흐릿한 윤곽 속에서 순간의 떨림을 붙잡으려는 그의 시도는, 서연이의 그림과 닮아 있었다. 선명하지 않기에 더 선명한 여운을 남기던 감정의 잔상.

어쩌면 서연이도 춤을 추는 대신, 춤을 기억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현실이라는 단단한 무대가 그녀의 꿈을 허락하지 않았을 때, 그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 꿈을 지켜나갔다. 손끝으로, 눈빛으로,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마치 드가가 붓으로 무희들의 숨결을 붙잡았듯이.

가끔 지하철 역사나 공원에 붙은 발레 학원 광고 포스터를 마주할 때면, 불쑥 서연이가 떠오른다. 책상 사이를 빙글빙글 돌며 날개처럼 팔을 펼치던 소녀. 지금의 그녀는 어디쯤에서 어떤 춤을 추고 있을까. 무대는 사라졌을지언정, 발끝으로 그리던 꿈은 여전히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을 것이다. 흔적으로, 그림자로, 혹은 삶의 조용한 리듬으로.

나는 문득 그 시절로 돌아간다. 교실 마룻바닥 위에 조명이 켜지고, 조그만 몸짓 하나가 세상을 환하게 밝히던 순간. 찐찐 짠짠, 기억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그 선율에 맞춰, 내 마음 한켠도 사뿐히 흔들린다. 드가의 그림처럼, 흐릿하지만 결코 잊히지 않는 빛으로.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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