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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사랑을 묻다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고통 없는 사랑을 묻다

— 사랑의 본질에 대한 조용한 성찰






정호승 시인은 “사랑 없는 고통은 있어도,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라고 말했다. 사랑이란 본래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상처의 결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 그 마음의 무게만큼 고통도 함께 자란다는 말은 오래된 진리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실의 두려움도 깊어지고, 기대가 커질수록 상처의 가능성도 커진다. 흔히 말하는 ‘사랑의 아름다움’은 그 고통을 견딘 자만이 얻는 결실이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반문하고 싶어진다.
“고통 없는, 순결하게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역설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을 다시 묻는 깊은 물음이다. 누군가는 이 질문을 낭만적 상상이라고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어 하는 사랑의 가장 높은 자리가 숨어 있다.

고통 없는 사랑이란 어떤 모습일까.
그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지 않고, 기대를 강요하지 않으며, 마음의 그림자를 상대에게 던지지 않는 사랑이다.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이별의 가능성조차 두려움이 아닌 자연의 한 흐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다. 삶의 무게와 감정의 불안함을 상대에게 떠넘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는 사랑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지점, 마음이 한없이 투명해지고 집착이 사라진 상태에서만 가능한 사랑일 것이다.

정호승 시인이 말한 ‘사랑의 고통’은 주로 이 집착과 기대,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언제나 불완전함이 따르고, 그 불완전함은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고통 없는 사랑을 이룬 사람은 이미 사랑의 본질을 소유의 감정에서 해방시킨 사람이다. 상대가 나의 기대에 맞춰야 한다는 욕망에서 벗어났고, 사랑을 관계의 힘겨루기로 보지 않으며, 사랑을 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삼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사랑을 만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론은 의외로 소박하다.
그 사랑을 억지로 해석하려 하지 말고, 자연의 빛처럼 조용히 받아들이면 된다.
고통이 없다고 해서 가벼운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을 넘어선 사랑은 가장 단단한 사랑이다. 불안이 사라진 자리에 평온이 깃들고, 소유의 욕망이 사라진 곳에서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 사랑은 상처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만큼, 존재 그 자체가 선물이 된다.

많은 이들이 사랑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상실이다. 그래서 사랑은 어쩐지 아프고 불안하며, 눈부신 순간에도 불길한 예감을 남긴다. 그러나 고통 없는 사랑은 상실조차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연이 다하면 놓아줄 수 있는 사랑, 그러나 인연이 머무는 동안은 온 마음으로 빛을 건네는 사랑. 떠남은 상실이 아니라 자연의 귀환이며, 머무름은 기적이 아니라 삶의 흐름일 뿐이다. 이 단순한 진실을 이해할 때 사랑은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난다.

사랑을 고통의 연장으로만 보는 시각은 인간의 욕망에 더 가까운 감정이다. 그러나 사랑을 자연의 이치로 바라보면, 고통보다 고요함이 먼저 다가온다. 해가 지면 어둠이 오는 것은 자연이고, 헤어짐 뒤에 그리움이 남는 것도 자연이다. 자연을 탓하지 않듯, 사랑의 흐름을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랑은 평온해진다. 그 평온 안에서는 고통이 자랄 자리가 없다.

고통 없는 사랑을 이룬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결론이 아니다.
그저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일, 억지로 이름 붙이지 않는 일, 의미를 과장하지 않는 일이다. 사랑은 분석하는 순간 흐릿해지고, 손에 넣으려는 순간 멀어진다. 그러나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바라보면, 누군가의 존재는 한 줄기 빛처럼 마음의 먼 곳을 밝혀준다. 그 빛을 붙잡으려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고 감사할 수 있을 때 사랑은 아프지 않다.

고통 없는 사랑을 만나게 된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마음이 성숙해졌다는 증거이다.”
사랑이 고통을 넘어서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사랑을 잃지 않는다. 사랑은 소유의 감정과 결별하고, 존재의 빛으로 남는다.
그 빛은 오래되고 단단하며, 무엇보다 조용히 아름답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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