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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순금 Jun 28. 2023

바퀴전쟁기(4) - 우울

타슈켄트 생존기

(저의 우울증에 많은 도움을 주신 아주대 앞 ㅇㄹ 정신건강의학과 ㄱㄱㅇ 선생님을 생각하며 씁니다.)


 선생님,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별걸 다 갖고 고민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티 내지 말고 들어주세요.


선생님 (끄덕)


 저희 집에 바퀴벌레가 나온지 한 달 정도 되었거든요. 그래서 좋다는 미국 약을 사서 바퀴벌레를 잡았는데, 아, 잡고 있는데 죽은 놈이 발견될 때마다 더 심란해요.

  선생님, 제가 검색해서 공부한 내용인데 먼저 들어 보세요. 이 약은 바퀴벌레가 좋아하는 성분과 냄새를 가지고 바퀴벌레를 유인해서 죽인대요. 짜놓으면 진짜 좀 구린 청국장 냄새 같은 게 나요. 그리고 바퀴벌레는 이 약을 먹은 담에 20분 안에 죽고, 이 약을 먹고 죽은 바퀴벌레를 먹은 다른 바퀴벌레가 또 죽고, 그렇게 또 죽고 또 죽고 ... 연쇄적으로 죽는대요. 바퀴벌레는 뭐 은신처로 돌아가서 다같이 먹이를 나눠 먹는 습성이 있다나요?

  그래서 인터넷 후기들을 보니까 이 바퀴약 짜놓으면 하루이틀 안에 숨어있던 바퀴벌레들이 우수수 나와서 널브러져 죽어 있대요. 막 빗자루로 쓸어 담는대요. 그렇게 바퀴벌레가 많이 죽었으면 그 중에 일부는 자기 소굴로 돌아가서 먹이를 나눠 먹든, 자기가 죽어서 다른 놈들의 먹이가 되든 했을 게 분명하겠죠? 나와서 죽은 놈이 그렇게 많으니까 또 그 정도는 돌아가서 죽었겠죠?  

아마존 리뷰 사진들 보면 이렇대요. #ADVION #GELBAIT

선생님 (끄덕이며 조용히 타자)


 선생님, 근데 우리 집은 바퀴벌레 약을 놨는데 하루에 제일 많이 발견한 게 고작 네 마리에요. 선생님 얘네가 이 약을 먹고 자기 소굴에 돌아가기나 했을까요? 이렇게 여기서 죽은 놈을 다른 놈들이 와서 잡아먹든지 해야 걔네가 연쇄적으로 몰살을 당할텐데 아무리 봐도 얘네는 그냥 혼자 나와서 혼자 약먹고 죽은 놈들 같거든요.

  그리고 약 먹은 담에 20분 안에 죽는다는데 이 작은 놈들이 20분 동안 산책도 하고, 바퀴약도 먹고, 집까지 돌아가려면 그게 시간이 될까요? 하.. 선생님 모르겠어요 진짜. 저는 얘네 은신처까지 싹다 죽여버리고 싶거든요. 근데 그러려면 좀더 많은 바퀴들이 나와서 죽어 널브러져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고작 세네 마리 죽어 나오는 정도로 이놈들 본거지까지 박멸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요? 이거 뿌리째 못 뽑은 여드름처럼 계속 나올 때마다 죽여야 하는 거 아닐까요? 영원히 바퀴벌레랑 같이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래서 요즘은 바퀴벌레를 잡았는데도 너무 막막하고 우울해요, 선생님.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선생님 답답한 상황이네요. 스트레스 받는 게 당연해요. 요즘도 계속 나온다고요?


 아니요. 이제 죽은 놈들만 간혹 나와요. 약 치고 첫날 죽은 놈 4마리, 둘째날 4마린가? 셋째날부터는 한두 마리 죽어서 발견되다가 요새는 없어요.


이렇게 전날 밤에 종이에 약 짜놓고 다음날 아침에 부엌에 들어가면 이렇게 죽어 있다구요. 저 긴 더듬이 좀 보세요..                     

선생님 그래도 약이 효과가 있네요. 살아 있는 바퀴는 이제 안 보이고?


 네.


선생님 걱정 마세요. 죽은 바퀴만 나오는 거면 거의 다 되었네요.


 선생님. 그런데 우리 집 바퀴를 다 죽인다고 해서 이 싸움이 끝날 것 같지가 않아요. 답답하기만 해요.


선생님 왜죠?


 처음에 태조 바퀴가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왔을까 고민해 봤는데.. 아무래도 집에 빈틈이 많은 것 같아요. 바퀴 약 바르면서 구석구석 살펴봤는데 우즈벡 사람들이 집을 하도 못 지어서 여기저기 구멍이에요. 그걸 다 막을 수가 없어요. 그럼 또 들어오겠죠?


선생님 그건 좀 걱정되는 부분이네요.


 그리고 선생님, 이게 더 중요해요. 우리 건물에서 바퀴 잡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저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선생님 예? 다른 사람들은 바퀴 안 잡나요?


 여기 사람들은 바퀴벌레랑 그냥 같이 사는 것 같아요. 어쩌다 들어온 태조 바퀴만 해도 그래요. 얼마나 온 건물에 드글드글하면 이렇게나 먹을 거 없는 우리 집까지 들어왔겠어요? 윗집이랑 주방이 이어져 있어서 그리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데, 윗집은 보나마나 바퀴 천국일걸요.


선생님 흠...


 선생님, 저는 이번 달 내내 바퀴벌레랑 싸우면서 저 혼자 엄청나게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 반지의 제왕 보셨어요? 거기 1편 반지 원정대 전투 씬이 헬름 협곡의 전투잖아요. 딱 그 상황 같아요. 나 혼자 우리 집을 지키고 있는데 주변은 전부 바퀴벌레. 너무 압도적인 개체 수에 그냥 할 말을 잃어버리는 거에요. 바퀴가 너무 싫으니까 최선을 다해 퇴치하려고는 하지만 그냥 사실 처음부터 지는 싸움 아닐까요? 저 혼자만 있잖아요. 이 큰 아파트에 저 혼자에요, 선생님.

헬름 협곡 전투 (이미지 출처 https://qph.cf2.quoracdn.net/main-qimg-4ff13836ce12c1bf4a1bbe2c4315ad65-lq)

선생님 그래도 다른 집 직접 들어가보진 않았으니까...


 안 봐도 딱이에요. 선생님, 제가 이거 보여 드릴까요? 우리 옆집인데요. 사실 겨울부터 저랬어요. 집 쓰레기를 자꾸 현관 앞에 둬요. 당장 갖다 버리기는 귀찮고, 집안에 두기는 냄새나서 싫고. 그래서 막 길게는 이틀 사흘씩 문밖에 쓰레기를 두는데 복도에 생활쓰레기 냄새가 얼마나 난다구요. 바퀴벌레를 완전 불러 모으고 있어요. 위생관념이라는 게 없다니까요? 너무 화가 나서 제가 옆집에 이런 것도 써붙여놨어요.

글쎄 이렇게 하루 넘게 그냥 둔다니까요? 아니 겨울엔 참아도 여름에는 진짜 못 참아요. 이렇게 써서 문앞에 딱 붙여놨어요.

선생님 저런, 매너가 없긴 하네요.


 매너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완전 개념이 없어요, 선생님. 여긴 세금 받아서 뭐하나 몰라요. 우리나라는 나라에서 공공 방역도 해주고 그랬잖아요? 저 어렸을 때 소독차 지나가면 애들 막 뛰어가고 그랬는데. 여긴 2023년인데도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각개전투에요. 그리고 전투는 나만 해요. 바퀴벌레 무서워하는 것도 저 밖에 없을걸요? 우즈벡 사람들 바퀴 그냥 손으로 때려 잡고 끝이에요.


선생님 현지인들하고는 생활 자체가 다르니까 어렵네요. 계속 걱정되면 바퀴약을 좀 더 사서 치는 게 어때요?


 두 달 버틸 정도로 사놓긴 했는데 더 사기는 너무 돈이 아까워요. 사실 비싸요. 요즘 돈도 없고요. 옷도 안 사고 외식도 안 하고 걸어다니면서 돈 한푼한푼 열심히 아끼고 있는데 바퀴약 따위에 돈을 써야 하는 게 너무 억울해요. 선생님, 왜 우리 집은 돈이 없어서 제가 이런 후진국까지 나와서 돈을 벌어야만 해요? 바퀴벌레 안 보고 살 수 있었잖아요. 돈 많은 집 애들은 이런 나라 안 나와요. 다 미국, 캐나다 아니면 영국 이런 데 가지. 너무 억울하고 화나요.


선생님 그래요.. (조용히 타자를 치시다가) 약은 평소처럼 드시고 우크라이나 가셔야 되니까 6개월치 넣어드릴게요.


 우즈베퀴스탄이요, 선생님. 우즈베퀴스탄. 또 올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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