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
지난 화 마지막:
그녀가 인형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작은 고양이 인형이었다. 같은 종류인데 색만 달랐다.
"저는 두 번 다 성공했는데요?"
"……."
"역시 약골."
"……그냥 상술이에요."
그녀가 킥킥 웃더니 인형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자, 이거요."
"……네?"
"하나는 그쪽 씨 거예요. 커플 인형!"
"제가 그쪽이랑 커플이요?"
"뭐래, 진짜 저도 싫거든요? 그냥 인형이잖아요 인형. 기념품!"
그녀는 괜히 큰소리로 고함을 치며 말했다. 당황스러웠나 보다. 나는 인형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에이, 이 정도야."
그녀가 웃더니 자기 가방에 인형 하나를 달았다. 그러고는 내 손에서 인형을 가져가 내 카메라 가방에도 나머지 하나를 걸었다.
"……이게 뭐죠?"
"칙칙한 가방에 귀엽잖아요."
"후…… 진짜 맘대로네요."
"네. 맘대로예요. 꼭 차고 다녀야 해요!"
그녀가 씩 웃었다.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텐진의 밤거리를.
한참을 걷다가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피로가 좀 쌓였을 것 같은데."
"네?"
"아까 가고 싶은 곳 있다고 했잖아요. 뭐였죠 그거."
"아! 포장마차!"
"거기서 오늘 일정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요?"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가요 가요!"
나카스 포장마차 거리로 향했다. 강변을 따라 포장마차들이 줄지어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사람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와, 진짜 포장마차다."
그녀가 감탄했다.
"뭐 먹을래요?"
"라멘! 라멘 먹고 싶어요!"
빈자리가 있는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좁았다. 어깨가 스칠 정도로.
"이라샤이마세!"
주인아저씨가 반갑게 맞아줬다. 라멘 두 그릇이랑 맥주 두 잔을 시켰다.
"그쪽이 웬일로 술을 먼저 시켜요?"
"어차피 시킬 거 아니에요?"
"정답!"
그녀가 웃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맥주가 먼저 나왔다. 잔을 들었다.
"뭐에 건배할까요?"
"글쎄요."
"음, 우리 우정을 위해!"
"윽 촌스럽네요."
잔을 부딪쳤다. 맥주를 마셨다. 시원했다.
라멘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와 우리 일본 와서 라멘 처음 먹어요."
그녀가 젓가락을 들었다. 한 입 먹더니 눈을 크게 떴다.
"맛있어요."
"많이 드세요."
"그쪽 씨도 어서 먹어요!"
나도 젓가락을 들었다. 오랜만에 먹는 라멘이라 그런지 아니면 쌀쌀한 날씨에 몸을 녹여줘서인지 맛있었다. 포장마차 안이 따뜻했다. 김이 서리고, 사람들 목소리가 웅성거리고. 그녀와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그쪽 씨."
"네."
"한국 가서도 만날 거죠. 그렇죠?"
"만나죠."
"진짜요?"
"네."
그녀가 웃었다.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약속이에요. 꼭이에요."
"네."
"그쪽 씨."
"네."
"저."
그녀가 말을 멈췄다. 나를 바라봤다. 포장마차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뭐예요?"
"아뇨. 아무것도."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웃었지만 어딘가 아쉬운 표정이었다.
"라멘이나 먹어요. 불어요."
"그러죠."
뭘 말하려고 했던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포장마차를 나왔다. 차가웠던 강바람이 이제는 시원하게 불어왔다. 그녀가 난간에 기대 기지개를 켰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그 뒷모습이.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또 찍었죠?"
"뭘요."
"인정하세요."
"네."
"도촬범."
"어차피 찍어달라 할 거 아니에요."
그녀가 킥킥 웃었다. 그러더니 나를 바라봤다.
"왜요?"
"그냥요. 그쪽 씨 얼굴 보고 싶었어요."
심장이 뛰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가요. 숙소."
"네."
강변을 따라 걸었다. 네온사인이 물 위에 일렁이고 있었다. 별말 없이. 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왔다.
"먼저 씻을게요!"
"네."
그녀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앉았다. 창밖을 봤다. 나카스의 야경이 보였다.
같은 방.
이제는 방을 같이 쓰는 게 익숙해졌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친구 사이인데 뭐 어때요,라고.
친구.
그래, 친구.
샤워 소리가 멈췄다. 잠시 후 그녀가 나왔다. 머리가 젖어 있었다.
"그쪽 씨 차례예요."
"네."
씻고 나왔다. 그녀가 침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쪽 씨."
"네."
"내일 마지막이잖아요."
"네."
"제일 재밌게 놀아요. 후회 없이."
"그러죠."
그녀가 웃었다. 드라이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피곤하다."
"많이 걸었으니까요."
"그쪽 씨도 자요."
"네."
불을 끄자 어둠이 내려앉았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불빛만 희미하게 방을 비추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뭔가 따뜻한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내 팔에 매달려 있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자면서 굴러온 건지, 아니면.
숨을 죽였다. 움직이면 깰 것 같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완전히 잠든 것 같았다. 따뜻했다. 그녀의 체온이. 샴푸 냄새가 났다.
어쩌지.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이 여자 옆에만 있으면 심장이 너무 시끄러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내일이면 마지막이다. 모레면 한국이다. 그녀와의 여행도 끝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귀찮기만 한 여자가 이렇게 크게 들어온 게.
그저 옛 생각에 방문하려고 한 이 여행이 갑자기 아쉬워진 게.
처음엔 그냥 우연히 만난 사람이었다. 길 가다가 마주친 내 성격과 전혀 반대인 귀찮고 시끄러운 사람.
근데 지금은 이 여자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뛴다. 웃는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게 된다.
떠나는 게 아쉽다.
그때 그녀가 갑작스레 잠꼬대를 했다.
"이 재수 없는 인간이, 너무 좋아."
숨이 멎었다.
뭐라고?
그녀를 바라봤다.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고른 숨소리.
꿈인가. 잠꼬대인가. 아니면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재수 없는 인간' 설마 나?
얼굴이 뜨거워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잠꼬대일 뿐이다.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거지.
그녀가 또 뒤척였다. 내 팔을 더 꽉 잡더니 아예 껴안아버렸다.
숨이 막혔다.
그녀의 얼굴이 내 가슴에 묻혔다.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어쩌지. 정말 어쩌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체온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내 심장 소리는 이제 그녀한테 들릴 정도로 커진 것 같았다.
잠은 완전히 달아났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대로 아침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길었지만 이런 밤이라면 괜찮다.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지.'
천장이 보였다. 햇살이 커튼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옆을 봤다. 그녀가 없었다.
'꿈이었나.'
그녀가 없어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머, 드디어 일어났네요? 왜 이렇게 기겁을 하고 일어나요, 어머 설마 나 사라졌을까 봐?"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거기 있었다. 이미 옷을 갈아입고. 화장까지 하고. 나갈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언제 일어날 건지 한번 두고 보자 했거든요."
그녀가 씩 웃으며 내 얼굴 앞으로 쑥 다가왔다.
가까웠다. 너무 가까웠다.
화장한 얼굴이. 웃는 눈이. 코앞에.
예뻤다. 이 사람은 나한테 해로운 사람이 분명하다. 여러 의미로.
"왜요? 왜 그렇게 봐요?"
"아무것도."
"에이, 또 그러네. 진짜 반했구나 나한테?"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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