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
지난 화 마지막:
"도대체 언제 일어날 건지 한번 두고 보자 했거든요."
그녀가 씩 웃으며 내 얼굴 앞으로 쑥 다가왔다.
가까웠다. 너무 가까웠다.
화장한 얼굴이. 웃는 눈이. 코앞에.
예뻤다. 이 사람은 나한테 해로운 사람이 분명하다. 여러 의미로.
"왜요? 왜 그렇게 봐요?"
"아무것도."
"에이, 또 그러네. 진짜 반했구나 나한테?"
그녀가 킥킥 웃으며 물러났다.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잠꼬대. 껴안고 자던 것.
그녀는 기억 못 하겠지.
"굼벵이 씨, 얼른 씻고 나와요!"
"네."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을 봤다. 씻고 나왔는데도 식은땀이 났다.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젠 이 여자와 함께 있는 게 신경 쓰인다. 그것도 너무나도.
'진정해. 진정하라고.'
방을 나섰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 됐어요?"
"네."
"근처에 파르코 백화점이라는 곳이 있다면요? 쇼핑해요! 마지막 날인데!"
"알았어요."
백화점 안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이것저것 구경하며 눈을 반짝였다.
"어? 저기 선글라스!"
가게에 들어갔다. 그녀가 선글라스 하나를 집어 들어 써봤다.
"이거 어때요?"
"잘 어울려요."
"진짜요? 그쪽 씨도 써봐요!"
그녀가 선글라스 하나를 내 얼굴에 씌웠다.
"오, 잘 어울리는데요? 같이 사요! 제가 선물해 줄게요!"
"또 커플템이요?"
"커플템 아니고 우정템이에요! 어머 커플이란 게 은근히 좋았나 봐요? 응큼해라."
"참.."
결국 같은 디자인 두 개를 샀다. 색만 달랐다.
"자, 인증샷!"
그녀가 핸드폰을 꺼냈다. 둘 다 선글라스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
찰칵.
"잘 나왔다!"
"그런가요."
그 후 이런저런 가게들을 둘러본 뒤 백화점을 나왔다.
"어? 저기 포토부스 있어요! 이게 일본에도 있구나?"
"또 사진이요?"
"마지막 날이잖아요! 추억은 많을수록 좋죠!"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 좁은 공간에 둘이 앉았다.
"자, 웃어요!"
찰칵. 찰칵. 찰칵.
사진은 네 컷이었다. 웃는 얼굴, 놀란 표정, 브이.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그녀가 갑자기 나를 뒤에서 껴안은 거였다.
"어머, 이거 제일 잘 나왔다. 표정 봐요. 정말 당황한 표정."
"갑자기 껴안고 그래요 놀라게.."
"쓰읍, 슬슬 나한테 넘어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쉽지가 않네~"
그녀가 한 장은 포토부스에 붙여두고 나머지 한 장은 반으로 찢어 나에게 주었다.
"서로 소중히 간직해요. 한 장을 반으로 나눈 거니까. 어머, 내가 말하고도 로맨틱하다. 그렇죠?"
"네. 뭐 그런 것 같네요."
"말 이쁘게!"
근처 카페에 들어가 파르페를 시켰다. 그녀가 한 입 먹더니 눈을 크게 떴다.
"맛있어요. 와 이래서 다들 디저트 먹는구나 일본 와서!"
"다행이네요."
"그쪽 씨도 드세요!"
숟가락을 내밀었다.
"제가 애도 아니고 직접 먹을게요."
"에이, 시끄럽고 아- 해요 아-"
그녀가 쓰던 숟가락을 내 입에 넣었다.
"맛있네요."
"그렇죠? 솔직히 방금 좀 설렜죠?"
행복한 하루였다. 카페를 나와 이것저것 둘러보고 인형 뽑기도 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뭐 먹을까요?"
"야끼토리 어때요?"
"좋아요!"
근처 야끼토리집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맥주와 야끼토리를 시켰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오늘 진짜 재밌었어요."
"저도 재밌었어요."
"그쪽 씨 말이 이제 조금은 진심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원래 진심이에요."
"에이, 처음엔 안 그랬잖아요. 정말 까칠했어요. 근데 지금은 그냥 바보인 건 알겠어요."
그녀가 웃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내일이면 돌아가야 하네요."
"그러게요."
"너무 아쉬워요. 그쪽 씨는요?"
"아쉽죠."
"진짜요?"
"네."
"그쪽 씨.."
그녀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네."
"좀 갑작스러운 건데, 저한테 말 못 하는 거 있죠? 일본에 오고 난 후 중간중간 그쪽 표정이 이상했어요. 힘든 일이 있었던 거 맞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이제는 어느 정도는 말을 해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렇죠.. 이제는 제 얘기를 해줘야 할 때가..."
그때였다.
"어? 하루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뜨겁게 떨리던 심장이 금방 차갑게 얼어붙었다.
고개를 돌렸다. 타케시였다. 친구 두세 명과 함께 있었다. 정말 운도 없다.
"야, 진짜 하루키네! 후쿠오카까지 왔어? 거봐 어제도 너 맞았잖아!"
그녀는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없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다! 그동안 어디 숨어 있던 거야?"
타케시가 다가왔다.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불쾌했다.
"어, 이 누나는 어제 그 누나네? 여자친구야?"
"신경 꺼."
"에이, 손잡고 있었잖아. 근데 넌 아직도 카메라를 들고 다니네? 양심이 있는 거야? 네가 어떤 애인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어 타카시가 말하는 말을 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듯 가게를 뛰쳐나왔다.
가게 문을 나서자마자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숨이 가빴다.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녀를 혼자 둬버린 채 나오다니. 무책임하게.
또 이러고 있다. 예전처럼. 그때처럼.
나는 시간이 그렇게 흘렀음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타케시 말이 맞다. 난 아직도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도망치는 것밖에 못 하는.
한숨을 쉬며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최악이다. 최악이야.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다시 한번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들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때였다.
"그쪽 씨!"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떠들어대는 이 여자에 목소리가 깜깜한 내 세상을 순간 환화게 비쳐주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뛰어오고 있었다. 헐레벌떡.
"왜 그래요!? 괜찮아요!?"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눈을 마주쳤다.
"그 사람들 뭐라고 한 거예요? 저 어차피 일본어 못 알아듣는 거 알잖아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요. 근데 그쪽 표정 보고 알았어요. 안 좋은 얘기였다는 거."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일어섰다.
"알았어요. 그쪽 입으로 직접 얘기할 생각이 없는 거, 이제는 잘 알겠어요."
나한테서 시선을 돌리며 말을 덧붙였다.
"저한테 말을 전부는 안 해줘도 돼요. 그래도 싫은 건 싫다고 말을 해야죠 그 정도는 말해줄 수 있는 사이잖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조금은 화가 나면서도 씁쓸해 보이는 그런 톤이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정말 힘든 일이 있어서 그 정도도 어려운 거라면"
그녀가 나를 내려다봤다.
"그쪽만의 표현 방법으로 과거를 잊거나 부딪혀 보거나 해요. 스스로 도망치지 말고 저는 어차피 그쪽 편이에요."
급하게 나오느라 카메라 가방을 대신 챙겨준 그녀가 내 어깨에 가방을 달아주면서 말했다.
"저 날라리 같은 일본인이 뭐라는지 저는 도통 알아들을 수도 없으니까요."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가요. 숙소로. 밤이 길 줄 알았는데 내일 일찍 가야 하니까 이만 쉬는 게 좋겠어요."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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