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남겨진 흔적-)
지난 화 마지막:
옷장을 열고, 서랍을 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예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근데 그 셔츠랑 바지, 여러 벌 있는 거죠?"
이 방에서 몇 년을 살았던가. 도망치듯 한국에 와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지냈다. 그런데도 내 옷장 속 옷들까지 아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신기했다.
짐정리를 끝내자 창밖에는 동이 트고 있었다. 어둠이 걷히고, 하늘 끝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래, 이곳 생활도 이제 정리해야지, "
손에 든 USB를 바라봤다. 이제 남은 건 이것뿐
"혜은 씨, 혹시 보내준 자료는 다 됐을까?"
"대리님, 이거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요?"
"혜은 씨, 이거 오늘까지 부탁해요!"
회사에서 내 이름이 하루에 도대체 몇 번이나 불리는지 모르겠다.
말단 사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정말 빠르게 직급이 올라갔다. 윗사람들도 많이 빠지고 어느덧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아 빠르게 승진된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없으면 이 부서가 돌아가기는 할까'라는 생각을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내가 인생에서 주연인 줄 알았다. 크고 나서 보니 대사 한 줄 없는 엑스트라 같은 삶을 살고 있지만
적어도 이 부서 안에서는 이름있는 조연정도는 되는 것 같다.
지금 직장에 꽤 만족은 하고 있지만, 여전히 매일 똑같은 평범한 하루, 안주하는 삶은 지겹다. 이 지겨운 하루를 바꿔보고 싶어서 연애라도 해볼까 생각했지만, 역시 나랑은 거리가 먼 얘기인 것 같다.
친구들은 이미 모두 연애를 하거나 결혼한 친구들도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락이 멀어졌다. 그렇다고 사이가 안 좋아진 건 아니어서 딱히 불만 같은 건 없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말수가 적어지고, 하루 일과가 일과 집에서 잠을 자는 것뿐이니 업무 능력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주위에서는 일 잘하는 사람, 능력이 좋은 사람 등 듣기 좋은 말을 자주 해주는 것 같았다.
어쨌든 연애는 나랑 다른 차원의 얘기인 건 이제는 잘 알겠다. 귀찮은 남자들은 참 많지만, 말 그대로 귀찮을 뿐이다.
"혜은 씨, 혹시 소개팅 받아볼 생각 없어?"
어쩌면 평범하기만 한 하루가 좋은 걸지도.
과장은 늘 나에게 시련을 주지만 이런 시련은 또 처음인 것 같다.
"네? 소개팅이요?"
"응 소개팅. 혜은 씨 정도면 얼굴도 이쁘고 능력도 좋고, 연애한 지도 꽤 됐다며? 아깝잖아 썩히기엔. 나이는 들어가는데."
과장은 늘 이렇게 겉으로는 듣기 좋은 말에 꼭 뼈 있는 한마디를 붙인다.
"네, 연애한 지 오래됐죠. 기억도 안 나요. 그래도 소개팅은 제 취향은 아니라서요..."
과장이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한 번 쓱 올리고는 답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해 봐! 사실 소개팅은 아니고, 6층 경영부 김 대리가 혜은 씨 관심 있어하던데."
김 대리. 남자답게 생긴 잘생긴 얼굴에 키도 꽤 크고 능력도 좋다고 소문난 그 사람이다.
"아, 김 대리님이요. 하하. 근데 저는 연애할 준비가..."
"에이 그러지 말고~"
"하하, 그럼 한번 뭐..."
"정말이지!? 그럼 나 오늘 혜은 씨 연락처 준다!?"
정말 이렇게 면전에서 반강제로 저렇게 말하면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그렇게 오후가 됐다.
점심을 먹고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는데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설마.'
"안녕하세요, 혜은 대리님. 저 경영부 김준혁 대리입니다. 연락처 받았는데 갑자기 연락드려서 괜찮을까요?"
"아, 네. 괜찮아요."
"다행이다. 저기, 혹시 금요일 저녁에 시간 괜찮으세요? 갑작스러운 건 알지만, 밥 한 번 같이 하고 싶어서요."
금요일? 갑자기?
솔직히 거절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어차피 금요일도 집에 가서 잠만 잘 거니까.
"아, 네. 금요일 괜찮아요."
"정말요? 그럼 퇴근하고 7시쯤 어떠세요? 제가 괜찮은 데 알아볼게요."
"네, 좋아요."
"그럼 금요일에 봬요!"
뭐지. 생각보다 일이 빠르게 흘러간다.
결국 금요일 퇴근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금요일이 기다려지지 않는 건 손에 꼽는데.
회사 앞에서 김 대리를 만났다. 정장 차림이 꽤 잘 어울렸다.
"안녕하세요, 혜은 씨.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죠?"
"안녕하세요. 네, 그렇네요."
"제가 근처에 괜찮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알아봤는데, 괜찮으세요?"
"네, 좋아요."
같이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조명이 은은하고 분위기 있는 곳이었다. 확실히 신경 쓴 티가 났다. 그래도 초면에 레스토랑에 와인이라니.
"여기 괜찮네요."
"다행이다. 하하, 금요일인데 예약을 안 해도 자리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네, 그렇네요. 고마워요."
김 대리와 이런저런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전혀 재미없는 얘기.
조금 피곤해서 다른 생각을 하던 찰나에 김 대리가 갑작스럽게 정신이 들 수밖에 없는 얘기를 했다.
"사실, 이렇게 초면에 말씀드리는 건 너무 당황스러우실 수 있겠지만 혜은 씨한테 관심이 있어요. 출근길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연락처를 조심스레 묻고 싶었는데. 워낙 사람이 많으니까 출근길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그보다 이렇게 정말 처음 만났는데 레스토랑에 와서 이렇게 말을 하다니. 설마?
"혜은 씨만 괜찮으면 저 한번 만나주시면 안 될까요? 처음부터 좋아해 달라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정말 꽤 괜찮은 사람이에요."
최악이다. 과장은 이런 걸 알고 있었을까.
"하하. 정말 오늘 처음 만났는데요?"
"아, 물론 당황스러운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좀만 더 만나보고 결정해 주세요."
완벽하다고 소문까지 나 있는 김 대리는 내 어떤 점이 좋아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니 그보다, 완벽한 김 대리한테 이런 치명적인 단점이 있을 줄이야.
"하하. 네네, 우리 조금만 더 만나보고 서로 알아가고 그렇게 해요."
"혜은 씨는 혹시 연애를 많이 해보셨나요?"
이 회사 사람들은 왜 이렇게 돌직구를 던지는지.
"당연히 했죠. 조금 오래 지났지만 직업은 디자이너였어요."
"아하, 그 이후는 없는 거고요."
알아간다는 게 이런 거라면 정말 최악인데.
"네, 뭐. 관심이 있던 사람은 있었는데 잘 안 됐어요. 그쪽에서 연락을 끊었거든요. 통보식으로. 그것도 벌써 몇 년 지났네요."
"몇 년이라... 꽤 오래전 이야기네요."
"네, 맞아요."
"그렇군요. 혜은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인데, 이쁘고. 왜 그랬을까요, 하하."
윽. 최악이다.
"하하. 그러게요."
김 대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는 걸 겨우 만류하고 우산을 사서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그 후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다만 레스토랑 음식이 꽤나 입맛에 안 맞았는지 속이 안 좋아서 컵라면이랑 맥주를 사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어디선가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야옹)
고양이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에 갈 곳을 잃은 길고양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잠을 자려나.
괜히 고양이를 보려고 비가 오는데 쪼그려 앉아 고양이를 봤다. 귀엽다.
사진 한 장을 찍고 집으로 가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나서 혼잣말을 했다.
"아,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가 했는데. 그 '웬수 같은 인간' 잘 살고 있을지 궁금하기는 하네."
3년 전, 그러니까 이 회사에서 내가 적응을 전혀 못 했을 신입일 때. 이상한? 아니. 단순 이상하다고는 못 하겠다. 기묘한. 그래, 기묘한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진짜 기묘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본인 이름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아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당시에 '그쪽'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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