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
지난 화 마지막:
고양이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에 갈 곳을 잃은 길고양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잠을 자려나.
괜히 고양이를 보려고 비가 오는데 쪼그려 앉아 고양이를 봤다. 귀엽다.
사진 한 장을 찍고 집으로 가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나서 혼잣말을 했다.
"아,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가 했는데. 그 '웬수 같은 인간' 잘 살고 있을지 궁금하기는 하네."
3년 전, 그러니까 이 회사에서 내가 적응을 전혀 못 했을 신입일 때. 이상한? 아니. 단순 이상하다고는 못 하겠다. 기묘한. 그래, 기묘한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진짜 기묘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본인 이름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아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당시에 '그쪽'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하루키라는 이름이 있긴 했다만, 뭐 본인이 안 좋아했던 이름 같았다. 그래도 뭐 어때? 이제는 있지도 않은 인간인데.
어쨌든 그 '하루키'라는 인간은 뭐 하나 제대로 알려준 게 하나도 없는데 나한테는 좋은 추억을 선물해 준 사람이기도 하다. 나도 참, 그때 그 얼굴에 홀려서 뭐가 좋다고 그렇게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는지. 어려서나 가능했겠지만.
어쨌든 하루키와 갔던 규슈는 나한테 크게 자리 잡은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일본에 관심이 생겨서 아직까지 일본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이제는 꽤나 능숙해진 일본어로 여러 지역을 다녀왔지만, 그곳만큼 나에게 큰 인상을 준 지역은 없었던 것 같다.
하긴, 길에서 마주친 사람을 몇 개월 뒤에 다시 공원 벤치에서 마주쳐서 술도 먹고 같이 자고 여행까지 갑자기 다녀온 그 기억보다 인상적인 게 있을 리가 없지.
다만 그 여행의 마무리 기억은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루키에게는 어떠한 비밀이 있었는데 그 비밀을 꽁꽁 감추다가 결국엔 마지막에 나를 두고 술집 바깥으로 튀어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하루키가 나를 두고 나간 거에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과거가 어쨌든 간에 그는 나에게 있어서는 기묘한 사람이고 조금 까칠하지만 사실은 다정한 그런 사람이었는데, 과거가 무서워 나를 피하는 느낌이 결국 고름처럼 터지고 그 순간에 서운함이 들었을 뿐이었다.
내가 좋아하고 나랑 그 당시에 있던 사람은 이름도 모르는 '그쪽'이었지 '하루키'가 아니었으니까.
한국에 귀국했을 때 그가 잘 들어갔냐고 문자를 보냈고, 조금 쌀쌀하게 보냈더니 답장도 없다가 한참 뒤에 갑자기 고마웠다는 문자를 보냈다.
뭐라고 했더라.
『고마웠어요. 아무래도 즐거운 여행을 저 때문에 망친 것 같아서 미안해요. 저는 이곳을 떠날 생각입니다. 얼굴을 보고 말을 하고는 싶은데 그럴 용기가 아직은 없어요. 끝내 제 비밀을 얼굴을 보고 얘기할 수 없어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저는 그쪽 덕분에 정말 좋은 기억을 가지게 되었어요. 유일한 친구가 되어줘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럼 건강하게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며 지내세요. 세상과 부딪히며.』
참. 갈 거면 늘 하던 대로 재수 없이 가던가. 이런 문자를 남겨두고 가니 한동안은 정말 힘들었던 것 같다.
단지 서운해서 연락을 안 했고,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를 너무 좋아했지만 나만 좋아하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에 끝까지 연락을 안 해 이내 마음을 접고 지내던 차에 이런 문자를 남겨두니 신경이 안 쓰일 래야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그를 좋아했던 마음은 이내 그리움으로 변했고, 그리움은 짜증이 섞인 분노로 바뀌었다.
그래서 그에게 전화도 해보았으나 나를 차단한 건지 이제는 없는 번호로 나왔고, 나도 그런 그에게 상응하듯 그에게 전에 준 명함에 있던 내 메일조차도 보기가 싫어 메일 계정을 하나 더 생성해 그 메일을 아직도 사용 중이다.
그때 내가 배운 건 앞으로는 내 마음을 먼저 보여주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에게 어떤 비밀이 있었는지 사실은 아직도 궁금하긴 하다. 단, 사람으로서 말이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그쪽 씨'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옛 생각을 하면서 걸어오다 보니 어느새 편의점 앞에 도착했다.
맥주 네 캔에 컵라면을 하나 집어 들고 계산해 집으로 왔다.
비를 조금 맞아서 바로 씻고 나오자마자 요즘 너무 지쳤는지 빨래도 제때 못 해 입을 잠옷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 한 벌 있긴 하지.
'고양이 프린팅이 그려진 분홍색 바지.'
버릴 래야 버릴 수가 없었던.
술을 계속 먹다 보니 어느새 취기가 올라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오늘따라 그 인간이 생각나는 거지."
단순히 그를 좋아해서, 혹은 미련이 남아서 이런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그와 여행을 하기 직전의 그 하루가 오늘 하루와 조금은 닮아 있어서다.
그는 이제 없지만.
취기를 이기지 못해 어느새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안 좋은 속을 달래러 해장을 하러 가는 길에 왜인지 모르게 또 그의 생각이 나 혼자 중얼거렸다.
"진짜 그날이랑 닮았잖아, 이거."
부정하고 싶었다.
해외까지 같이 다녀와서는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않고 떠나버린다고 통보하고 사라져 버린, 번호를 바꾼 건지 나를 차단한 건지 알 수도 없는 그가 정말 원망스러웠는데 이제서야 갑자기 생각이 나는 걸 부정하고 싶었다.
해장을 하면서도 그와 비행기표를 잡고 숙소를 잡고 들뜬 마음으로 집에 갔던 그런 잊고 있던 기억조차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와 함께했던 그날을 다시 느끼고 싶어 공원에 가서 벤치에 앉았다.
시원한 바람. 그때도 이런 바람이 불었지. 아, 좀 쌀쌀했었나? 술집도 가고 같이 비도 피하고 여행도 가고. 그 짧은 시기에 참 여러 가지를 같이 했던 것 같다.
뭐, 그래도 다 지나간, 그것도 한참 오래전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은 이 시끄럽게 토요일 아침부터 연락을 보내는 김 대리를 상대하는 데 바쁘다.
월요일이 되면 분명히 과장이 어땠는지 물어볼 텐데 적당히 둘러댈 생각을 해야겠다.
월요일.
주말은 어쩜 이렇게 일찍 지나가는지 정말 평생을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 없다.
월요일 오전은 늘 분주하다. 오후가 끝날 때쯤 어느 정도 바쁜 손들이 느슨해졌다.
"혜은 씨, 어떻게 됐어? 금요일에?"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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