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코에서 가을

ep.22

by 추설

지난 화 마지막:


해외까지 같이 다녀와서는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않고 떠나버린다고 통보하고 사라져 버린, 번호를 바꾼 건지 나를 차단한 건지 알 수도 없는 그가 정말 원망스러웠는데 이제서야 갑자기 생각이 나는 걸 부정하고 싶었다.

해장을 하면서도 그와 비행기표를 잡고 숙소를 잡고 들뜬 마음으로 집에 갔던 그런 잊고 있던 기억조차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와 함께했던 그날을 다시 느끼고 싶어 공원에 가서 벤치에 앉았다.

시원한 바람. 그때도 이런 바람이 불었지. 아, 좀 쌀쌀했었나? 술집도 가고 같이 비도 피하고 여행도 가고. 그 짧은 시기에 참 여러 가지를 같이 했던 것 같다.

뭐, 그래도 다 지나간, 그것도 한참 오래전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은 이 시끄럽게 토요일 아침부터 연락을 보내는 김 대리를 상대하는 데 바쁘다.

월요일이 되면 분명히 과장이 어땠는지 물어볼 텐데 적당히 둘러댈 생각을 해야겠다.


월요일.

주말은 어쩜 이렇게 일찍 지나가는지 정말 평생을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 없다.

월요일 오전은 늘 분주하다. 오후가 끝날 때쯤 어느 정도 바쁜 손들이 느슨해졌다.

"혜은 씨, 어떻게 됐어? 금요일에?"


ep.22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온 건 역시나 과장이었다.

나는 약간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음, 괜찮았어요. 아직은 좀 더 봐야겠지만?"

"괜찮았구나? 그래그래 좀 더 봐보고 그래봐. 커피도 한 잔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먹고. 김 대리가 얼굴도 잘생겼고 능력도 좋은데 연애를 못 해서 서로 아쉬워서 그래~"

"아, 네. 좋은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이후로는 자기 할 말만 잔뜩 늘어놓고 과장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평소와 같이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김 대리가 주말에 만나자는 문자를 보냈다.

주말이 왔다.

회사 근처 술집에서 김 대리를 만났다. 이번에는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혜은 씨. 오늘도 예쁘시네요."

이 느끼한 대사는 이제는 메시지를 하도 많이 보내서인지 조금은 적응이 된 것 같다.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자리에 앉아 맥주와 안주를 시켰다. 이번에도 역시나 회사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김 대리가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혜은 씨,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그분. 전에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분은 어떤 분이셨어요?"

순간 멈칫했다. 왜 갑자기 그 얘기를.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혜은 씨가 오랫동안 연애를 안 하셨다고 하니까."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왜인지 모르게 말이 술술 나왔다.

"아주 웬수 같은 인간이었죠."

"네?"

"얼굴은 잘생겼는데 비밀은 많고, 궁금하다고 해도 알려주지도 않고. 목소리 자체가 작아서 말도 어눌해서 뭐라는지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그마저도 성격이 까칠해서 말도 못 되게 했고요."

"하하..."

"직업은 프리랜서 같은 사진작가였는데, 뭐 사진은 본 적이 없어요. 그 사람이 찍은 사진들. 아무튼 그렇게 사라졌어요."

말을 하다 보니 그동안 쌓여있던 서러움과 분노가 섞여 나왔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김 대리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물 한 컵을 마시고 말했다.

"하하. 그렇군요. 혜은 씨가 그렇게 감정 담아서 얘기하는 건 처음 보네요."

"그래요?"

"네. 지난번 레스토랑이나 회사에서 가끔 대화할 때도 그렇게 본인 감정을 잘 안 드러내셨던 것 같은데."

김 대리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요즘 같은 세상에 프리랜서 사진작가라니.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고.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네요. 혜은 씨 같은 분을..."

순간 가슴이 저릿했다.

왜지. 왜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과 똑같이 말하는데 기분이 안 좋지.

"그러게요..."

그 후로 김 대리를 퇴근 후나 주말에 보는 일이 꽤 잦아졌다.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술도 마셨다.

그러다 어느 날이었다.

"혜은 씨."

"네."

"저 이번에는 정식으로 고백할게요."

멈칫했다.

"저 혜은 씨 정말 좋아해요. 만나면 만날수록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

"저랑 사귀어 주세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준비가 덜 돼서요.. 생각해 볼게요. 미안해요.."

"아직은 생각이 더 필요한 거군요.. 네. 기다릴게요.."

그 후로도 김 대리는 계속 연락을 했다. 밥 먹자, 커피 마시자, 영화 보자.

그 이후로 어느 날 금요일이었다.

"혜은 씨, 제 대답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요?"

"그게.."

김 대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설마 아직도 그 책임감도 없는,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이 그리워서 연애 안 하시는 거예요?"

"..."

"그런 놈팽이 같은 놈은 잊고 저를 만나세요. 저는 도망 안 가요. 우리 정도면 운명이에요. 같은 엘리베이터를 늘 타고, 구내식당에서 먹는 메뉴조차 닮았잖아요. 일 처리부터 뭐든지 저랑 잘 어울려요. 저희가 운명일지 어떻게 알아요"

"..."

"그런 사람은 잊고 이제 저랑 행복하게 지내요. 이렇게 퇴근하고 만나고 주말에도 데이트하고 그런 책임감 없는 사람은 당신을 벌써 잊었을 거예요. 더군다나 프리랜서 사진작가라니 그걸로 본인 앞가림도 어려워서 도망간 거겠죠"

순간 피가 끓어올랐다.

"그쪽..."

아니. 그쪽이라는 말은 이 사람한테 쓸 말이 아니지. 얼마나 다른데.

"저기요. 김준혁 대리님."

"네?"

"저랑 김 대리님은 하나도 어울리지도 않고 맞지도 않아요."

"네? 갑자기 왜..."

"특유의 능글스러움은 능글스럽다를 넘어 징그럽기까지 하고, 말투부터 옷차림 모든 게 너무 싫어요 저는. 그리고 첫 만남에 웬 고급 레스토랑에 와인?"

김 대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그 사람, 그 웬수 같은 인간은요. 책임감이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제 소중한 친구였어요. 남들 한 번쯤은 다녀오는 해외에 바로 옆나라인 일본조차 돈이 없어서 갈 엄두도 못 낸 저한테 선뜻 비행기표에 티켓에 여행경비에 모든 걸 다해줄 정도로 저한테는 모자람이 없던 사람이었고요. 근데 그쪽은 제가 회사에서 적응도 제대로 못한 신입일 때 제가 보이긴 했나요?"

"그건.."

"그리고 제가 진심으로 좋아함을 넘어 사랑했던 사람이고요. 이제는 분명 남이고 그 인간을 좋아하는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인 김대리님이 욕할 사람이 절대 아니에요."

숨을 한 번 골랐다. 술집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말을 멈출 수 없었다.

그동안 참고 지내던 울분들을 토해내는 느낌이었다.

"운명이요? 어떻게 단어 하나하나가 그렇게 징그럽죠? 제가 여태 점심에 어떤 걸 먹는지도 모두 보고 그럴 정도면 정말 끔찍하겠네요. 운명. 그래 운명이라고 하니까 말해주는 건데요 그 사람은 저랑 길에서 처음 마주치고 몇 개월 뒤에 다시 우연히 만나 며칠 뒤 해외까지 다녀온 사람이에요. 차라리 운명이란 게 있다면 그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죠. 다시는 저한테 연락하지 말아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찬 바람이 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저렇게까지 말했지.'

'왜 이렇게 화가 났지.'

'그 인간이 뭐라고.'

눈물이 났다. 쉽게 멈추지 않았다.

"뭐야. 나 아직도..."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모른 채 들어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과장이었다. 역시나 눈치가 없다.

"여보세요?"

"혜은 씨! 주말인데 미안한데 급한 건이 하나 있어서!"

"네? 무슨 일이요?"

"예전 거래처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어. 우리가 거절했는데 그래도 옛정이 있으니까 해달라고 하더라고. 자료가 필요한데 빨리 처리해줘야 할 것 같아."

"아, 네. 많이 급한 거면 어쩔 수 없죠"

"당시 담당 직원에게 부탁을 하고 싶다고 거래처가 그쪽 메일로 자료를 보냈다고 하던데. 당시 담당자가 혜은 씨야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할게."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급하게 노트북을 켰다. 메일을 확인했다.


없다.


뭐지?

생각해 보니 예전 거래처라 예전 메일로 보낸 거였다. 그 메일. 안 쓴다고 했던 그 메일.

한숨을 쉬며 예전 메일 계정에 로그인했다.

거래처 메일을 찾아 급하게 처리했다. 과장한테 완료했다고 연락을 보냈다.

"혜은 씨 주말인데 너무 고마워! 조만간 보답할게!"

"아뇨, 일인데요."

전화를 끊고 한숨을 돌렸다.

"후. 징그러운 김 대리랑 마신 술이 다 깨버렸네."

노트북을 끄려는데 갑자기 한 아이디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안 쓰는 메일이라고 분명 말했는데. 웬 메일이지.

클릭했다. 2년 전에 온 메일이었다.

열었다.

순간 숨이 멎었다.

사진이 있었다.

모지코 바다. 노을빛. 그리고 웃고 있는 나.

너무 예뻤다. 그 사진 속의 내가.

노을빛이 얼굴을 물들이고,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고, 활짝 웃고 있는 내 모습.

이렇게 예뻤던 적이 있었구나. 내가. 웃고 떠들고.

눈물이 흘렀다.

메일 본문을 읽었다.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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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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