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지난 화 마지막:
"하지만 혹시라도 정말 힘든 일이 있어서 그 정도도 어려운 거라면"
그녀가 나를 내려다봤다.
"그쪽만의 표현 방법으로 과거를 잊거나 부딪혀 보거나 해요. 스스로 도망치지 말고 저는 어차피 그쪽 편이에요."
급하게 나오느라 카메라 가방을 대신 챙겨준 그녀가 내 어깨에 가방을 달아주면서 말했다.
"저 날라리 같은 일본인이 뭐라는지 저는 도통 알아들을 수도 없으니까요."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가요. 숙소로. 밤이 길 줄 알았는데... 내일 일찍 가야 하니까 이만 쉬는 게 좋겠어요."
일어서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숙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먼저 씻더니 "먼저 잘게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나도 씻고 나와 등을 돌린 그녀 옆 끝쪽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어젯밤은 그렇게 행복했는데.
지금은.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아무 잘못도 없다. 오히려 내 편이라고 했지만 난 역시 아무 말도 못 했다. 내가 내 편이 아니기에.
예전처럼. 그때처럼.
전에 그녀에게 세상과 부딪히라고 말한 나는 이런 말도 할 자격이 없는 겁쟁이다. 정작 부딪혀야 할 사람은 나니까.
눈을 감았지만 역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동안 잠을 못 자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엔 마음이 무거웠다.
눈을 떴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회색 하늘 아래로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옆을 봤다. 그녀는 이미 짐을 싸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네. 어제는.. 미안했어요 그곳에 혼자 두고 나와서.."
"안 미안해도 괜찮아요. 그보다 비 오네요. 비행기 시간이 빠르니까 빨리 준비해요."
그게 전부였다.
씻고 짐을 챙기는 동안에도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농담도, 장난도.
방을 나서 체크아웃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제법 굵었다.
잠시 처마 밑에 서서 빗줄기를 바라봤다. 마치 이 여행의 끝을 알리는 것처럼.
침묵을 먼저 깬 건 그녀였다.
"비가 내리니까 그냥 택시 타고 가는 건 어떨까요?"
"네, 그럴까요."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창밖으로 빗줄기가 흘러내렸다.
어색해진 사이가 견딜 수 없어서 말을 건넸다.
"아침 뭐 먹을까요? 공항에서 뭐라도."
"됐어요. 입맛도 없고 피곤해요. 일찍 일어나서."
"그렇군요."
창밖을 봤다. 빗속의 후쿠오카가 스쳐 지나갔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처럼 밝았던 이 사람이, 지금은 비 내리는 하늘처럼 빛을 잃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후쿠오카 공항.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쳤다. 출국 심사를 통과했다.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았다. 비행기 시간까지 30분. 할 말은 많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탑승 시작.
비행기에 올라 나란히 앉았다. 창가는 그녀, 복도는 나.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륙.
창밖으로 후쿠오카가 작아져 갔다. 모지코도, 시모노세키도, 나카스도. 며칠간의 추억이 점처럼 멀어졌다.
그녀는 창밖만 바라봤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약 한 시간 반 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를 통과하고 짐을 찾아 공항 로비로 나왔다.
"여기서 헤어지면 되겠네요."
"네."
"저는 버스 타고 가요. 그쪽은요?"
"저도 버스요."
"같은 방향이네요."
"네."
침묵이 흘렀다.
버스 티켓을 끊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같은 버스.
"그쪽 씨 먼저 타요."
"네?"
"저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잊고 있었네요. 다음 거 탈게요."
"무슨 일이요? 역시 어제.. 그 일 때문에"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냥요. 먼저 가요."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럼. 얼른 타요"
"네. 조심히 가요... 미안해요 먼저 가서"
버스에 올라 창가에 앉았다. 창밖을 보니 그녀가 서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그녀가 멀어져 갔다.
평소 그녀 성격이라면 손이라도 흔들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연락을 보냈다.
'조심히 잘 들어갔어요? 버스는 탄 거죠?'
저녁 늦게서야 답장이 왔다.
'네'
그게 전부였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역시나, 다시 한번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녀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손도 대지 않았던 카메라 가방을 꺼냈다. 그녀가 달아준 고양이 인형이 흔들렸다.
선글라스.
반으로 나눈 포토부스 사진
각종 영수증, 뽑은 피규어들.
전부 그녀와의 흔적이었다.
창밖을 봤다. 서울의 밤. 역시 별 하나, 위성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그쪽만의 표현 방법으로 과거를 잊거나 부딪혀 보거나 해요. 스스로 도망치지 말고.'
그녀 말이 맞다. 난 계속 도망쳐왔다. 예전부터. 그때부터. 지금까지.
컴퓨터를 켜 사진 폴더를 열었다. 그동안 찍어온 사진들을 밤새 하나하나 USB에 옮기기 시작했다.
다 옮기고 나서 방을 둘러봤다.
옷장을 열고, 서랍을 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예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근데 그 셔츠랑 바지, 여러 벌 있는 거죠?"
이 방에서 몇 년을 살았던가. 도망치듯 한국에 와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지냈다. 그런데도 내 옷장 속 옷들까지 아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신기했다.
짐정리를 끝내자 창밖에는 동이 트고 있었다. 어둠이 걷히고, 하늘 끝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래, 이곳 생활도 이제 정리해야지, "
손에 든 USB를 바라봤다. 이제 남은 건 이것뿐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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