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코에서 가을을

ep.24 (진실-2)

by 추설

지난 화 마지막:


"아, 네…"

"그럴 줄 알았어요. 게시물에 하트 누른 거 보고 '아, 혜은 씨 하루키랑 어떻게 된 걸까' 싶었거든요. 도통 말을 안 해주니까."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 그게."

"괜찮아요. 물어보세요. 뭐든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하루키는 유학할 때 어떤 사람이었어요?"

"유학이요?"

유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하루키, 그 사람 유학을 했었잖아요. 일본에서."

유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 하루키가 말을 안 했나요?"

"네?"

유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하루키는 유학생이 아니에요."

"네?"


ep.24 (진실-2)



"하루키는 재일교포예요. 그것도 차별을 꽤 받았던. 재일교포들은 10년, 20년 전까지만 해도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았으니까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지만 실제로는 지금도 있겠죠. 보통 이름조차도 본인들 이름이 아닌 일본 이름으로 사용하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재일교포?’

그가 유학생인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런 줄 알았는데..?

근데 재일교포라니?

처음부터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고?

그것도 차별을 받으면서?

"혹시.. 차별이라면 어떤 차별을?"

유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조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 얘기는 안 하는 게 좋겠지만,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하루키를 생각해 주다니. 혜은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말해도 괜찮겠죠."

그 말에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그렇다. 나는 시간이 지나도 하루키가 계속 생각난다.

"고마워요, 유미 씨."

"아뇨.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하루키 편이 있는 거라면 저도 좋은 일인걸요. 다만 자세한 얘기는 역시 하루키 본인한테 듣는 게 좋을 거예요."

유미는 창밖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하루키는 조금.. 아니 많이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부모님은 5살 때 소식이 끊겼고, 할머니가 키워주셨거든요. 근데 할머니가 몸이 많이 편찮으셨어요. 어릴 때부터 참 힘들었을 거예요."

"그렇군요.."

"할머니는 일본 분이셨는데, 하루키한테 늘 말씀하셨대요. '넌 일본 사람이지만 한국 사람이기도 하다. 한국어를 꼭 배워야 한다'라고. 그래서 하루키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 양쪽 언어를 다 배워야 했어요."

"아..."

"근데 할머니는 한국어를 모르세요. 그러니까 하루키가 혼자 독학을 해야 했던 거죠.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알려주신 희미했던 한국어를 공부하고 찾아보고. 그러다 보니 어느 쪽도 완벽하게 못 하게 된 거예요. 애석하게도 일본에서 지내야 하는 하루키가 부모님께서 한국어를 먼저 가르치는 도중 사라진 이유로 양쪽 언어를 익숙하게 못하게 된 거죠"

가슴이 저렸다.

"사실 재일교포 중에 그런 사람은 꽤 있어요. 근데 *쇼와시대도 아니고 하루키처럼 어릴 때부터 그렇게 심하게 괴롭힘을 당한 경우는 드물거든요. 학교에서 한국인이라고 놀림받고, 말이 어눌하다고 따돌림당하고. 그러다 보니 점점 말수가 줄고, 사람을 경계하게 된 거죠."

유미가 한숨을 쉬더니 말을 덧붙였다.

"저도 처음엔 하루키의 까칠한 성격이 불편했던 게 사실이에요. 하루키를 다시 보게 된 건 제 오랜 친구인 카렌 덕분이에요. 하루키가 카렌 말을 참 잘 듣고 잘 따랐거든요. 하루키의 유일한 친구였던 카렌의 친한 친구가 저였고요. 그래서 셋이 고등학교 시절을 자주 붙어 다녔죠."

"그러다가.. 하루키는 학창 시절 마지막에 일이 있었어요. 이 얘기는 당사자가 아닌 제가 자세하게 해 줄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

"아뇨! 정말 고마워요, 유미 씨."

"언젠가 하루키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본인은 한국어도 일본어도 제대로 구사할 수 없는 게 어쩌면 조금 슬프다고."

목소리가 작다고, 말투가 어눌하다고 불만을 가졌던 내가 한심하고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 혜은 씨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당연한 거예요. 방금 '내가 나쁜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했죠?"

유미가 정곡을 찔렀다. 유미는 참 마음이 고운 사람이었다.

"그래도 하루키가 연락이 두절되고 떠난 뒤, 꽤 오랜 시간 동안 유일한 친구는 당신이었을 거예요. 하루키와는 지금은 꽤 자주 얘기하는데, 당신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나는 눈이 휘둥그레 해져 유미를 쳐다봤다.

"저, 저요?"

"네. 혜은 씨요. 한국 생활에서 유일한 친구가 좋은 친구였어서 본인은 그걸로도 만족한다며, 그 까칠한 하루키가 웃으면서 말했거든요."

마음이 먹먹해졌다. 나는 그 사람을 '웬수 같은 인간'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에게 좋은 친구였다니.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다.

"저는 혜은 씨가 하루키를 꼭 만났으면 해요. 정말로요."

눈시울이 붉어지고 이내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얼어붙은 감정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이거 봐요, 혜은 씨. 이렇게 하루키를 좋아해 주는 사람한테 어떻게 제가 하루키는 잘 살고 있으니 신경 끄라고 말하겠어요. 이럴 때는 보통 남자가 연락하는 게 맞는데, 걔가 뭐 보통 애인가요."

흐르는 눈물 사이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하긴 그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었지.

유미는 너무 고마운 사람이었다. 당시 아무 생각 없이 교환한 SNS 계정이 이렇게 시간이 지나 연을 만들어주다니.

"정말 고마워요, 유미 씨. 하긴 그 인간이 저한테 먼저 연락할 사람이 아니죠. 근데 유미 씨는 왜 이렇게 저한테 잘해 주세요?"

"그건 앞서 말한 대로 혜은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요. 하루키도 물론이고. 그리고 제 친구 카렌도 그걸 바랄 거고요."


카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지금은 하루키와 어떻게 된 걸까.



*쇼와시대(昭和, しょうわ)는 쇼와 천황이 재위했던 시기에 사용한 일본의 연호이자 시대 구분입니다. 일본 역사상 최장 기간 사용된 연호로 1926년에 ~1989년 해당합니다.


*여기서 천황이란 표현은 일본 군주의 고유 명사입니다. 국내에서는 학술/외교적으로는 천황을 사회/정서적으로는 일왕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writer: 추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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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jpg 작품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야기『세상에 없던 색』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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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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