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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성호 Cha sungho Oct 07. 2024

아내에 대한 단상

이틀 내내 겁나게 퍼붓던 비가 그치고 평온한 아침이 찾아왔다

지리산 아래 사는 우리 동네는 의외로 큰비나 태풍이 와도 별 피해 없이 지나가는 편이다오히려 뉴스를 보는 친지들이 더 걱정이 돼서 피해 없었느냐는 전화가 오긴 하지만.

근데 이 평온한 아침에 그 억수같이 내리던 비에도 끄떡없던 중에 뜬금없이 나 자신에게 탈이 났다나의 카카오톡 타이틀에 적힌 마침내 적을 만났는데 그 적은 바로 나였다라는 문구처럼 가족과 가벼운 아침을 먹던 중에 느닷없이 내 윗어금니 하나가 빠져 버린 것이다.

요즘 다이어트 하느라 아침을 거의 안 먹던 내가 모처럼 누룽지 한 그릇을 먹는데 입안에 뭔가 큰 돌 같은 게 들어있는 느낌이 들었다식탁에 가만히 뱉어보니 아뿔싸, 5년 전에 했던 금니가 아닌가한 달 여 전부터 사실 조금 흔들리는 느낌은 있었다근데 이렇게 불쑥 빠지다니그것도 부드러운 누룽지를 먹는데 말이다하긴 냉수 먹고 체한다는 말도 있긴 하지.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단골 치과에 예약을 하고 아내와 같이 진주로 내려갔다사실 혼자 가도 되지만 병원 갈 때는 어쩐지 아내랑 같이 가고 싶다병원 갈 때에는 보호자가 꼭 필요한 법이다병원에서 의사와 세세한 치료 상담 하는 것도 아내가 나보다 더 낫다어쩐지 나이가 들수록 더 의지가 되는 든든한 파트너이다

빠진 이는 결국 임플란트 하기로 하고 나흘 뒤 예약을 잡았다병원을 나와 바로 옆 중앙시장 쪽으로 걸었다목적이야 어떻든 모처럼 아내와 시내 나들이 하니 기분이 좋다마치 어릴 때 엄마 따라 시장 구경 가던 것처럼

바쁠 것도 없이 천천히 걸어가며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옷 가게 앞을 지나다 멈춰 섰다. 길가에 전시해 놓은 옷을 보고 아내는 고르고 고르던 끝에 맘에 드는 청바지를 삼만 원에 샀다내가 봐도 괜찮아 보였다아내가 맘에 드는 옷을 사고 흡족해하는 걸 보니 나도 기분이 좋다.

우린 중앙시장에 올 때마다 들르는 코스대로 골목 안쪽 족발가게에 들러 족발도 하나 사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튀김가게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가게 의자에 둘이 걸터앉았다.

떡볶이 1인분 어묵 2개, 우리 딸에게 줄 떡볶이 1인분도 포장했다그래봐야 칠천 사백 원

우리 부부의 행복한 간식 시간이다젊은 시절에는 이렇게 시장 튀김집에 걸터앉아 뭘 사 먹는 게 부끄러웠는데 이제 아내와 함께 이렇게 주전부리하는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는 나 자신을 본다

사는 게 별거 있나이렇게 시장에서 먹고 싶은 것도 사 먹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며 아내와 함께 걸어가는 이 시간들이 참 행복하다고 느꼈다

 

나이가 들어가며 아내는 참 소중한 동반자며 친구다병원 갈 때에만 필요한 보호자가 아닌 내 삶의 보호자이다내가 아내보다 세 살 위지만아내가 한 번씩 그런다이제 친구야 친구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나 1년여 연애할 때에도 아내는 한 번도 내게 오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나 자신 역시 형제 중 막내여서 오빠라는 호칭을 들어보질 못해서 익숙하지도 않았지만

나이 들면서 농담으로 아내에게 오빠 못 믿나?”라며 허튼소리를 할라치면 아내는 바로 반박한다오빠는 뭔 얼어 죽을 오빠야나이 들면 친구지 친구이제 아내의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요즘 들어 이런 친구 같은 아내의 존재가 새삼 고마워진다

 


보통 남자들은 아내가 밥 해주고 빨래해 줘서 고맙고 필요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내게 아내는 그래서 고마운 사람만은 아니다매일 같이 밥상머리에서 시시콜콜한 세상 살아가는 얘기 나눌 수 있는 상대로 있어주고 함께 여행을 갈 수 있고 장 보러 가기도 하기에 나는 외롭지 않은 행복 남이다. 

나이가 들면 남자는 점점 연약해지고 여자는 점점 씩씩해(?) 진다. 호르몬 변화라는 자연적인 현상이다남자라는 존재는 아마 죽을 때까지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보다. 하루도 아내의 소소한 잔소리를 듣지 않는 날이 없다내가 그렇게 칠칠치 못하다는 말인가그래도 잔소리해 주는 아내가 있어 행복하다바로 건너 이웃에 이십여 년을 아내 없이 혼자 사는 분이 있다그분은 잔소리하는 아내가 없어 행복할까

내게 있어 아내는 정서적인 존재다아내란 말은 안의 해’ 즉 내부의 해 같은 존재라는 말이라든가난 애초부터 아내를 마님으로 위치 설정을 하고 나는 마님을 행복하게 해주는 충직한 돌쇠로 살기로 작정했었다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생의 기쁨이다이 역할에 그동안 충실했었는지 생각해 보면 아직도 반성할 부분이 많다하지만 아내는 마님과 돌쇠라는 정서적 거리를 점점 좁혀서 친구라는 관계로 격상시켜 주었으니 내심 고마울 따름이다요즘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따려고 학원에 등록하고 공부 중이다.

평생을 내게 수고한 아내에게 이제는 내 손으로 맛있는 밥상을 차려주고 싶은 꿈을 이루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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