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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혜 Jul 07. 2023

케이크는 어찌 되어도 좋아

나는 '리틀콘크리트'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홈베이킹 수업을 하고 있다. 이 수업에는 '케이크는 어찌 되어도 좋아'라는 이름이 있다. 케이크 수업을 하면서 케이크가 어찌 되어도 좋다니, 다소 황당하겠지만 이런 수업을 하게 된 이유는 2021년도에 썼던 푸드에세이로 그 설명을 대신할까 한다. 이 글은 '오뚜기 제1회 푸드에세이 공모전'에 출품한 글로 감사하게도 대상인, '오뚜기상'의 행운까지 안겨다 주었다.





케이크는 어찌 되어도 좋아

-엄마의 카스테라가 알려준 인생 레시피-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 앉는 봄날이면 볕 아래 웅크린 엄마의 뒷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타닥 타닥 큼지막한 믹싱볼에 계란 거품을 내는 소리가 나른한 집안에 울려 퍼져요. 그 빛바랜 믹싱볼은 매일 저녁 아버지가 좋아하는 부추전 반죽을 만드는 그릇이기도 하죠.


그 옛날 값비싼 오븐이 집에 있을리가 있나요. 책가방 정도 크기의 휴대 미니 전기 그릴 오븐이 집에 있었어요.  고구마나 감자도 구워 먹고 고기도 굽던 아무튼 미니 오븐이라 부를 그걸 꺼냅니다. 어머니는 거기에 은박지를 깐 뒤 병아리색의 뽀얀 카스테라 반죽물을 붓고 뚜껑을 닫아요.  드르륵 타이머의 다이얼을 돌려 시간을 맞추면 째깍 째깍 네모난 상자 안에서 마법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집안 곳곳을 채우면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은 온통 노릇노릇 구워지는 카스테라를 향해 있었죠. 사랑에 빠진 기분 같기도 하늘로 날아 오르는 기분 같기도 세상에 단 하나의 향기만 남겨두어야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카스테라 굽는 냄새를 남겨두고 싶어요. 그렇게 카스테라가 부풀어 오르는 동안 제 마음도 한껏 부풀었답니다. 

 

 띵! 드디어 타이머의 벨소리가 울리고 엄마와 언니와 함께 오븐 앞에 모여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어요. 먹음직스러운 연한 갈색빛을 띄는 카스테라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 옵니다. 칼을 가져와 정사각형 모양으로 슥슥 자른 뒤 식기도 전에 얼른 입안으로 집어 넣습니다. 어머니가 내어주신 우유와 함께 은박지에 눌러붙은 빵까지 싹싹 긁어 먹었어요. 그런 우리를 보며 어머니는 행복한 웃음을 짓곤 하셨죠.


어린 시절 어머니가 구워 주시던 카스테라는 지금까지 살면서 먹은 빵 중에 가장 맛있는 빵이었습니다. 그 어떤 유명한 베이커리 파티시에가 만든 디저트도 어머니의 카스테라를 뛰어넘지 못했어요. 저는 압니다. 엄마의 기술이 뛰어나서도 값비싼 도구와 재료를 사용해서도 아니란 걸요.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은 반짝이는 지혜와 정성 그리고 가장 맛있는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물론 어떤 날은 오븐을 열었는데 카스테라가 부풀지 않아 납작하게 주저앉은 날도 있었어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멋쩍게 웃던 어머니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빵인지 떡인지 모를 그것을 함께 뜯어 먹으며 “괜찮아, 그래도 맛있어!" 하하하 웃던 기억들.


저는 4년 전부터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어요. 사람들과 함께 달콤한 디저트를 만드는 일입니다. 일과 관계 등으로 마음이 힘겨웠던 어느 날,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카스테라를 굽던 순간이 생각 났어요. 그때의 행복하고 달콤한 추억을 떠올리며 맛있는 음식의 비밀을 행복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겠다 다짐했죠. ‘레시피' 보다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요.


자금은 충분치 않았어요. 임대료가 저렴한 동네를 찾고 찾아 70년대에 지어진 낡은 아파트 상가 한 켠을 계약했어요. 카스테라 색의 페인트를 칠하고 셀프 인테리어를 마친 작은 스튜디오를 완성했어요. 집에 있는 것들로 대충 만들어주시던 엄마의 그 카스테라처럼요. 완벽하지 않지만 지금 제가 가진 것들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했죠. 저는 이곳에서 고급 레스토랑이나 화려한 디저트 숍에서 판매할 법한 디저트가 아닌 마치 한가로운 오후 엄마가 집에서 구워줄법한 다정한 홈메이드 디저트 레시피를 연구해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화려하지도 완벽하지 않아도 이곳을 좋아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음식을 비롯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마음'에 달려 있구나 깨달았어요.


베이킹 클래스의 이름은 '케이크는 어찌되어도 좋아'입니다. 시험 보는 날이나 학교 대표로 중요한 대회에 나가는 날이면 어머니는 '너무 잘하지마' 하며 제 등을 토닥여 주셨어요. 욕심과 부담감이 클수록 실수하고 포기 한다는 걸 알려 주신거죠. 능력이 없어서 하지 못한 일보다 용기가 없어서 시작 못한 일들이 우리에겐 더 많아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우리가 걷고 달리고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실수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 것. 저는 그렇게 '엄마의 카스테라’에서 배운 인생의 레시피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케이크도 굽고 맛있는 추억을 나누며 때론 혼자 들기 버거운 마음을 내려 놓기도 합니다. 그럴때마다 저는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처럼 이런 위로와 응원을 건네요. "두려울 땐 ‘케이크는 어찌 되어도 좋아’라는 주문을 외워 보세요. 그리고 용기 내어 마음 편하게 케이크를 만들어 보세요. 인생이란 케이크 말이죠." 


저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벅찬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값진 보물을 찾고 싶어 내가 있던 초라해 보이는 곳으로부터 더 멀리 가려고 애쓰며 살아왔는데 손에 쥐었을 때 그건 반짝여 보일뿐 보물이 아니었어요. 내가 찾던 보물은 가장 가까이 내 안에 밝게 빛나고 있었어요. 엄마의 카스테라가 알려준 인생 레시피의 또 다른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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