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원래부터 이 세상에 없던 사람처럼 말이죠. 어디로 갔는지 왜 사라졌는지 그 이유는 몰라요. 아무 말 없이 사라졌거든요. 그 후에는 한 번도 볼 수 없었죠. 아버지가 사라진 현실은 가혹했어요. 남아 있는 엄마와 나는 살아남아야 했거든요.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니라 행방불명으로 처리가 돼서 우리에게 더 불리했어요. 우린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어요. 하지만 집에서 살림만 했던 엄마는 돈 버는 게 서툴렀죠. 게다가 순진해서 그런 건지 아님 사회를 너무 몰라서 그런 건지 사기도 당하고, 빌려준 돈 못 받기도 했죠. 위태로웠지만 결국 우린 살아남았죠.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버지가 사라짐과 동시에 난 특별 학생이 되었죠. 남들과는 같은 삶을 포기해야만 했어요. 정말 악착같이 버틴 거 같아요. 공부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했으니 말이죠. 덕분에 난 세상을 일찍 알게 됐죠. 약하면 바로 당한다는 자연의 법칙을 말이죠. 하지만 사람들과 같이 살기에 난 너무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벽을 세웠죠. 다른 사람들에 넘어오지 못하게 말이죠. 그 덕분에 살아남았지만 그 때문에 사람들과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 거죠.」
민희는 담담히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민혁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마음속 날 괴롭히고 있는 것을 꺼내면 편해질 것 같았는데, 막상 꺼내놓으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네요. 너무 상처가 곪아서 그런 건가요?」
「진짜 괴롭히는 게 그게 아닌가 보죠.」 민혁은 민희의 자조 섞인 말에 조용히 답했다.
「진짜라. 하긴 날 괴롭히는 게 한두 개가 아니긴 하죠.」
「처음이잖아요. 처음부터 다 꺼낼 필요는 없어요. 꺼내 놓는 게 익숙해지면 점점 더 깊은 곳에서 끄집어낼 수 있을 거예요.」
「근데 나만 이야기하는 건가요?」
「상담시간에 의사가 말하는 거 봤어요?」
민혁은 웃음 섞인 어조로 이야기했다.
「제 이야기는 좀 더 나중에 들려드릴게요. 상담시간 아닐 때」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긴 하지만 양보하죠 뭐」
「손해라니요. 이렇게 공짜로 상담을 해드리잖아요.」
「저랑 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이익이 있잖아요.」
방금 한 말은 민희에게는 꽤 과감한 시도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말을 해봤다.
「지금 한말 남들은 그걸 ‘추파’라고 하죠. 너무 과감해지시는 거 아니에요?」
민혁은 그녀의 추파가 싫지 않았는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의사가 훌륭해서 그런가 봐요.」
민희는 그 때문에 변해가는 스스로가 좋았다. 그래서인지 변화 속도의 기울기는 그 무엇보다 가팔랐다.
「바뀌는 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돌팔이 의사에서 벗어난 건 좋네요. 참 내일 형사가 온다는 건 기억하고 계시죠? 혹시 무슨 이야기 하려고 하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 뭐 문성식이란 남자와 저의 관계에 대해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미 소문이 다 나서 형사 귀까지 들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어제 그런 일도 있고 해서 이제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 그렇군요? 둘이 무슨 관계였는데요?」
「그의 부인이 와서 난리 친 거 보면 짐작 가지 않아요?」
「전 상황만 보고 짐작하는 게 싫어서요. 확실치 않잖아요.」
「누가 의사 아니랄까 봐. 뭐. 흔히들 불륜이라고 부르는 사이죠. 그런데 불륜이라고 하기도 애매해요. 왜냐면 난 그를 사랑한 적이 없거든요. 그냥 만난 건데..」
「사랑하지도 않는데 왜 만난 거죠?라고 형사가 물어볼 거예요 아마도. 그는 우리 같은 사람을 이해 못 할 거예요.」
「그의 이해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어떤 식이든 이번 사건이 빨리 끝나도록 이야기하려고요. 언제까지 제가 병원에 누워 있을 수도 없고.」
「아. 퇴원하시려고요?」
「눈 빼고는 딱히 아픈 곳도 없잖아요.」
「그래도 아직 문성식이 잡히지 않은데 괜찮겠어요?」
「내일 그것도 한번 형사랑 이야기해봐야겠어요. 문성식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자유까지 뺏기고 싶지는 않아서요.」
「내일 형사랑 이야기할 때 옆에 있을게요. 불편하면 바로 이야기해요.」
「뭔 일 있겠어요. 옆에 있으면 좋겠지만 편한 대로 하세요.」
「내일도 상담받을 거죠?」
「네. 아직 편해지지 않아서요.」
「그럼 오늘은 이만할까요? 내일은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걸 꺼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만 자요.」
민혁의 마법 같은 말은 이번에도 민희를 수면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