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빙그레) 이글스 팬과 현대 유니콘스 팬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태생부터 야구빠 DNA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이 시절부터 이글스 팬을 만들기 위해 아빠는 맛있는 음식으로 나와 동생을 꼬셨다. 하지만 우리 남매는 그저 음식만 즐겼을 뿐, 야구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광현이란 선수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야구빠 DNA를 깨우고 말았다.
때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한일전 선발 투수로 나선 김광현의 모습을 본 순간, 나의 마음속에 야구가 들어오게 되었다. 더구나 김광현은 내가 사는 인천을 연고지로 하는 팀의 에이스 투수였다. 이건 마치, 나의 야구 DNA가 깨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처럼 느껴졌다.
김광현 선수에게 빠지게 된 이유로, 잘생긴 외모도 있었지만 그 와일드한 투구폼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때는 구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외적인 요소에만 눈길이 갔다.)
이쯤 되면 나의 첫 번째 SK 와이번스 유니폼엔 '김광현'의 이름이 박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놀랍게도 나의 첫 유니폼엔 '정근우'라는 이름을 박았다. 단순히 그날 정근우 응원가가 너무 신나서 '정근우'를 박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새 유니폼을 장만해야만 했지만.
욕하면서도 계속 보는 야구
나의 29년 인생 중 제일 많이 한 거짓말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나 내일부터 야구 안 본다. 야구 보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199999번째 환생한 개다.
처음엔 그저 승패에 따라 기뻐하고 아쉬워하는 정도에서 끝났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잘해도 아쉬운 점이 보이고 못하면 화나는 '이상한' 팬이 되어 버렸다.
야구 기록, 데이터, 작전 등 야구의 디테일한 부분들을 알게 되면서부터 점점 변한 것 같다. 같잖은 훈수를 두는 꼴값을 떨면서 화를 내는 꼴사나운 팬이 되어버렸다. 깊게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나의 모습이 꽤나 민망해, 몇 해 전부터는 자중하려고 노력해 왔다. 물론 올해는 그러지 못했지만.
매번 화를 내지만 언제나 이 감정들의 끝은 "그래도 내일은 잘할 거야."이다.
가끔은 순수하게 승패에만 울고 웃으며 야구를 즐기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야구를 더 깊게 이해하게 되어, 그만큼 더 진하게 즐기게 된 점이 좋다. 물론 그 대가로 수명이 단축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
친구들이 "너는 야구가 왜 좋아?"라고 물을 때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부담스러웠다. 왜냐면 나는 그냥 '재미있어서' 좋아하는 것뿐인데, 왠지 심오한 인생철학을 담아 대답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련해 둔 2개의 심오한 대답이 있다.
"내일을 맞이할 이유가 되니까."
내 삶은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공부, 시험, 다시 공부, 또 시험. 이 노력이 성과로 돌아오지 않으니, 지쳐버렸다. 만약 내일도 똑같은 내일이라면, 이제 그만 나에게 내일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을 못 이루고 한참 뒤척이고 있을 때, '야구 하이라이트 영상' 업로드 알람이 울렸다. 그 경기는 SK와이번스가 아쉽게 진 경기였다. 그 하이라이트를 보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졌지만, 내일은 이길 수 있으니까.내일은 챙겨 봐야겠다.'
내일이 필요 없던 나에겐 내일을 맞이할 이유가 되었다.
"선수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뿌듯하니까."
박경완 선수의 사인에 의지하며 공을 뿌리던 루키 김광현 선수가
우리 팀 1 선발이자 국가대표 단골 선수가 되고, 메이저리그 성공적인 데뷔 시즌까지 치르고 돌아온 베테랑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젠, 신인 선수들의 인터뷰에 롤모델 투수로 항상 언급되는 선수가 되었다.
김성근 감독님의 3루 수비 특훈을 받고, '소년 장사' 수식어가 붙던 최정 선수가
각종 홈런 기록들을 갈아치우고, 성공적으로 3번의 FA도 계약하고, 언제나 팬들의 자부심이 되어주는 든든한 베테랑 선수가 되었다. 최정 역시, 신인 선수들의 인터뷰에 롤모델 타자로 항상 언급되는 선수가 되었다.
응원하는 선수가 꿈을 위한 첫 발걸음을 딛고, 그 꿈을 이루고, 이젠 누군가의 꿈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팬으로서 굉장히 특별하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 '성장 과정'은 나에게 큰 울림을 준다.
처음엔 그들의 성장이 그저 부럽기만 했다. 하지만 계속 보다 보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자그마한 용기들이 생기게 되었다. 선수들이 성장하듯,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