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였다. 부모님의 모임에서 가족 단위로 단체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 여행을 가서, 나는 놀지 않았다. 외고 시험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또래 친구들이 밖에서 신나게 뛰어놀 때, 나만 방에 틀어박혀 영어 듣기 평가 공부를 했다. 그때 느꼈던 서러웠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나를 왜 그 여행에 데려간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수련회에 가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학사 일정이 꼬이게 되면서, 수련회를 다녀온 2주 후에 시험을 치렀어야 했다. 그래서 밤마다 문제집을 펴놓고 공부하는데, 진짜 최악이었다. 만약 모든 학생들이 그냥 놀고 있었더라면, 나도 마음 편히 놀았을 것이다. 하지만 3분의 1 정도가 책을 펴놓고 공부하고 있으니, 어떻게 마냥 놀 수만 있겠냐고.
'여행'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여행지에서 공부를 한 기억뿐인데, 내가 어찌 여행을 좋아할 수 있을까.
20대 초반, 친구들의 꼬임에 넘어가 기차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친구를 하면서,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던 우리였기에 평온한 여행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행을 가서, 머리 끄댕이만 안 잡았지 눈빛과 말로 수백 번은 싸웠다. 서로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각자 자신의 여행 스타일로 단체 여행을 이끌려고만 했다. 이 여행에서의 감정 소비가 너무너무너무 커서, 여독을 푸는 것보다도 감정을 회복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행'은 늘 부정적인 기억만 떠오르게 하는 단어였다.
그런 내가 여행을 갔다 왔다. 심지어 혼자 다녀왔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20대에 꼭 해봐야 하는 리스트'를 보게 되었다. 나는 몇 개나 해봤을까 궁금해서 찬찬히 리스트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많은 항목 중에 내가 해본 것은 고작 2개뿐이었다. 친구들에게도 이 리스트를 보여줬다. 친구들은 나와는 다르게 꽤 많은 항목들에 체크를 했다.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방황과 우울 속에 잠겨 있던 시간 동안, 친구들은 자기들만의 20대를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괜히 억울하기도 하고, 과거의 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온갖 감정의 혼동 속에서 어지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비하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기에, 당장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리스트에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여행하기'
물론 그 리스트에는 '유럽 여행'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여건상 내가 갈 수 있는 것은 국내 여행이었다.
그래서 여행을 딱히 좋아하지 않은 내가, 혼자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내가 친구들에게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아무도 믿지 않았다.
"네가 여행을 간다고? 지하철 타고 인천에서 서울 넘어가는 것도 큰맘 먹고 가는 네가?"
내가 예약한 내용들을 보여주자 그제야 친구들이 믿기 시작했다. 놀라는 것도 잠시, 내가 제대로 예약했는지를 몇 번이고 확인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내가 여행 간다는 소식에 설레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여행을 가기로 결심하고, 숙소와 교통편을 예약하고, 여행 당일 영등포역 플랫폼에 서있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