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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May 30. 2024

징징대는 것도 전략이 필요하다

독일에 살다 보면 '징징'대야 할 일이 참 많다. 

징징대는 성격이 아니고, 그런 거 싫어하더라도 그래야 할 일이 생긴다. 불만을 해결하고 싶다면!


관청 예약이 터무니없이 늦게 잡히거나

계약서와 다른 대우를 받고 있거나

집에 문제가 생겼거나

제품이 맘에 안 들거나

차별을 당한다거나 

심지어 직장에서 받고 있는 연봉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당신이 독일에 있다면? 징징대야 한다. 단, 감정을 쏙 빼고 전략적으로. 

독일인들은 개인의 사적 감정엔 관심 없지만 객관적인 문제엔 해결하려는 의지를 꽤 보인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생긴 불만을 항의하기 전에 이를 객관적으로 잘 포장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래 실제 내가 겪은 사건들 중 일부를 가져왔다.




관청예약이 급한 상황이다. 

아무리 급해도 일단은 '그들이 하라는 절차'를 다 밟아야 한다. 어디는 전화, 어디는 온라인 등 제각각 예약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되든 안되든 하라는 건 하자. 이마저 안 하면 문제의 원인이 '내'가 된다. 그리고 기다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기다린다. 할 만큼 했다는 걸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데드라인이 가까워올 때쯤, 반박할 수 없는 이유를 준비한다. 예약이 안 잡혀 중요한 계약 진행이 안된다거나, 일 시작을 못한다는 등 '생계에 지장이 갈 만한'이유를 들이밀며 긴급예약을 부탁한다. 그러면 대부분 예약이 곧바로 잡히거나 안 잡히더라도 책임을 관청에 물을 수 있다. (이사 후 14일 내 주소이전을 안 해도 이 방법이라면 벌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값비싼 인터넷 계약을 했는데 속도가 거북이 수준이다.

분명 계약할 때는 다운로드 속도가 1기가까지 나온다고 했는데, 실제로 써보니 10메가 수준이다. 100메가가 나와도 10배 느린 건데, 10메가라면 무려 100배가 느린 것이다. 한국에서 이랬다면 이미 집단 소송 들어가고 남았을 텐데, 독일 고객들은 착한 건지 인내심이 하느님 수준인 건지 조용하다. (안 보이는 곳에서 열내고 있을지도). 아무튼 이때도 역시 '감정 뺀 징징 전략'이 필요하다. 불만사항을 접수하고 하라는 대로 개선방안을 따라본다. 역시 예측한 대로 나아지지 않았고, "그냥 쓰세요"라는 영양가 없는 소리나 들어야 했다. 업무도 제대로 못하는 인터넷에 피 같은 돈을 쏟아붓고 있자니 수족냉증이 한방에 나을 것 같은 천불이 올라온다. 나는 화를 꾹꾹 누르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 계약은 무효이며, 이유는 무엇이고, 나는 어떠한 노력을 했고, 당신들의 서비스는 왜 형편없는지, 해지하지 않으면 어떤 법적 절차를 밟을 것인지. 그렇게 2년 간 묶일 뻔했던 계약을 일주일 만에 중도 해지 할 수 있었다.


신축 아파트에 비가 샌다. 

이전에 살던 집이 비만 오면 집 안으로 비가 새서 물바다가 됐었다. 새로 지은 아파트, 그것도 중간층 집안으로 비가 샌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누가 독일 건축기술 좋다고 했나? 곧장 관리사로 전화했더니 돌아오는 말은 이랬다. "풍속이 xx m/s이상이면 창문은 어찌어찌(설명생략) 관리해야 하는데 제대로 했나요? 창가엔 전자기기 놓으면 안 되는 거 몰라요?" 내가 그 해 들은 말 중 가장 어이없고 황당한, 신박한 개소리였으며 마치 아이를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굉장히 거슬렸다. 아, 집에 풍속기 하나 정도는 있는 게 기본이구나. 창문이 이렇게나 많은데, 전자기기를 놓으면 안 되는구나. 노트북은 거실 한가운데에 놓아야겠네? 어이없는 실소와 함께 단전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시 머리를 차갑게 하고 합리적으로 징징댈 방법을 생각한다. 건물문제이므로 관리사가 아니라 건축사에 연락하여 건물 전체 방수 점검을 요청했고, 우리처럼 창문을 '잘못' 관리하고 있는 집들을 체크하여 관리회사에 대응할 증거를 모았다. 그리고 며칠 뒤 소리소문 없이 문제가 해결됐다. 건축사에서 외벽 방수 결함을 발견하고 재시공을 한 것이다. 그 뒤로 관리사에서 풍속이 어쩌고 하는 따위의 소리는 없었다.




왜 이런 징징대기가 먹힐까? 


쉽게 말해 징징대면서 책임소재가 자연스레 상대방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독일에선 어떤 문제를 책임진다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한다. 그들이 사과에 말을 아끼는 이유도 잘못했다고 시인하면 '내 책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령 진짜 본인의 실수라도 사과하지 않고 해결책만 얘기하고 끝내는 편이다. 직장에서도 업무실수를 한 직원들이 사과하는 걸 본 게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태도가 주는 의미가 큰 한국인의 시각으로는 뻔뻔해 보일 지경이다. 그래도 감정적인 사과를 바라기보단 '당신 책임 확실한데? 내가 뭘 더 어떻게 해?'라는 식의 차가운 전략적 징징대기로 접근하는 게 빠른 해결 방법이다. 여긴 가슴보단 머리가 먹히는 곳이니까.

 


제목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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