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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오마주 Apr 22. 2024

어른이 먼저 사과하는 세상

가족이야기. 마지막


© louishansel, 출처 Unsplash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은 대체로 어른이다. 물론 아이에게 상처받기도 한다. 모르고 한 말에, 모르고 한 행동에, 아이라서 더욱 상처받기도 한다. 부모가 되면서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든다. 대쪽 같은 내 성격을 받아내느라 상처받았겠구나, 난 보통이 아니었구나, 반성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상처도 있다. 어른들은 화난 마음에 무방비 상태의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 그저 조금 더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른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보다 억울했던 일들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좋은 일들도 많은데, 내 억울함을 발판 삼아 다른 사람에게 실수를 줄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가장 어려운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그런 감정을 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책도 읽고, 영상도 찾아보고 적극적으로 공부한다. '혼난다'라는 말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하고 싶다.


어딘데? → 놀아도 숙제는 해야지, 씻고 밥은 먹어야지 


하기 싫어? → 놀아도 숙제는 해야지, 씻고 밥은 먹어야지 


그만 놀아라. → 놀아도 숙제는 해야지, 씻고 밥은 먹어야지 


20만 년 전, 인류의 뿌리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 중에 우리들의 몇십 년은 '화낼 권한'을 가지지 않는다. 회사에 한 달 먼저 들어온 사람이 선배라고 으스대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선배가 맞긴 맞는데, 역사적으로 말이 우습다. 돌보는 의무만 있는 게 억울할 수는 있겠으나, 착하게 살아야 착하게 돌려받는다. 착하게 말해야 착하게 대답한다.


 아들에게는 고민이 있다. 남에게 미안한 마음에 자기가 상처를 받은 듯하다. 친한 친구 둘이 있는데, 같은 날 생일 파티를 한다고 해서 고민했다. 먼저 말한 친구에게 간다고 한다. 아이는 며칠 밤잠을 설쳤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초대장까지 줬는데, 거절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에 선물과 '미안하다'라는 짧은 편지까지 써서 오늘 등굣길에 보냈건만,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았다. 


"진심으로 사과하면, 친구도 마음 알아줄 거야." 말하고 등을 토닥였다.


 얼마 전에 남편은 아들 친구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있다. 남편이 하는 말들이 다 맞았고, 아이는 못된 행동을 했다. 사람으로, 친구로, 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엄하게 혼내고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남편이 지나가던 아이를 불러서 사과했다. 


"내가 너한테 화난 건 미안해. 그건 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너도 잘못했어. 명확하게 말해야지, 사람을 휘두르는 듯이 말하는 건 잘못된 거야. 앞으로 그러지 말자."


남편이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하니, 아이가 '네'하고 응답했다.


 어제 조카는 시아버지께 인사를 하지 않아서 혼났다. 변명한다는 게 '안 보였다'라고 했는데, 듣는 사람은 화를 냈다. 마음속으로는 '아이는 그냥 사과하면 될 것이고, 어른은 아이한테 먼저 인사해도 될 텐데.' 생각했다. 아이는 무방비 상태에서 쓴소리를 들었지만, 최대한 괜찮으려 애썼다. 잠시 밖에 볼일을 보고 다시 들어왔을 때, 시아버지는 조카를 불러 세웠다. 사과였을까? 대화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이는 계속 '예' 대답하고 있었다. 어른이 먼저 아이에게 좋은 말로 해주는 게 사과의 첫 형태다.


 사과의 여러 모습을 보면서 친정엄마가 떠올랐다. 친정엄마에게 인생을 사과받은 적 있다. 'K-장녀'로 중학교 이전 학창 시절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였다. 남동생 공부와 숙제를 봐줬다. 남동생이 제대로 못하면 대신 혼났으며, 맏딸이라서 더 많이 혼났다. 남아선호사상이 짙은 그 시절, 첫 딸을 낳아서 시어머니인 할머니에게 차별 대우를 받았고, 그 시절 서러움에 예뻐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K-장녀 O라이'로 변신한 계기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을 것이다. 벌어도 벌어도 힘든 살림이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월등하게 학원을 많이 다니거나 용돈을 많이 받지 않았다. 엄마가 부엌으로 나를 불렀다. 가계부를 펼치고, 내게 말했다.


"소녀 가장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봐, 아껴봐."


극 사춘기에 돌입한 단계여서 더욱 극대노했다. 나는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 


"부모가 돼서 자식한테 한다는 게, 그딴 소리밖에 없냐. 그냥 입 줄어들게 죽어줄게!"


상처받은 영혼은 걷잡을 수 없었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에게 더 이상의 남은 애정도 주지 않겠다고 엄포했다. 그 이후로 학창 시절에 엄마에게 극단적인 행동을 해댔다. 화가 나면 싸놓은 도시락을 현관에 버리고 갔다. 기분이 안 좋으면 일주일이라도 투명인간 취급했다. 못된 말을 들으면 더 못된 말로 대갚음했다. 그런 학창 시절이 지나고, 사춘기도 끝이 나고, 대학도 갔고, 취업도 했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그런데, 풀리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친구도 이야기했다. 30대가 넘어서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더 자주 생각나는 것 같다고 했다. 결국 호적팔 작정하고 말했다.


"사과받아야겠다. 아이를 낳아보니 이렇게 예쁜데, 엄마한테 사과받아야겠다."


"엄마가 미안해. 그땐 엄마도 어리고 힘들었나 봐."


그 한 문장을 듣는 순간, 인생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도 착한 사람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감정을 묵히지 말고 더 일찍 풀걸. 죽을 듯이 힘들었던 학창 시절에 조금만 더 먼저 사과해 주지, 마음을 좀 알아주지, 원망했던 마음도 싹 사라졌다.


쉽지 않다. 그렇다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냥 살아도 힘든 세상이다. 어른이 먼저 사과하면 좋겠다. 미안하다고 말하기 어려우면, 먼저 등을 어루만져 주자. 아이보다 선배라면, 좋은 선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어른으로 사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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