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방콕에서는 코끼리바지가 최고지

그래도 흠이 있었으니.

by 다독임 Mar 02. 2025
아래로

겨울방학의 끄트머리, 새 학기를 코앞에 두고 강추위를 피해 달아난 곳은 태국 방콕이다. 작년 가을쯤 항공권 특가의 유혹에 또 충동질되고 만 것이다.


허니문 이후 십여 년 만에 찾은 방콕. 이곳에 오면 꼭 사야지 했던 것은 바로 코끼리바지였다. 태국의 상징적인 동물인 코끼리를 모티브로 한 이 바지는  다양한 색과 패턴, 천상의 착용감이 특징이다. 전 세계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코끼리바지를 태국 사람들도 즐겨 입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관광객 티 팍팍 나더라도 가족 유니폼으로 입어보려고 일찌감치 쇼핑 목록에 올려 두었.


방콕에서 코끼리바지는 노점이든 쇼핑몰이든 몇 걸음만 가도 볼 수 있을 만큼 지척에 널려있었다. 이름은 같아도 색깔과 무늬는 천양지차. 가격도 파는 곳에 따라 100밧에서 300밧까지 다양했. 한국돈으로 대략 4천2백 원에서 1만 2천6백 원. 

처음엔 200밧짜리만 보이길래 좀 더 싼 거 사보겠다고 미루고 미루다 여행 셋째 날에야 120밧짜리 네 벌을 구입했다. 


가족 모두 무채색을 선호하여 무난한 것으로 하되, 남다른 허벅지를 가진 아들을 위해 그나마 제일 큰 걸 찾고자 한참을 뒤적거렸더랬다. 숙소에 돌아와 입어보니 모두 다 편안한 착용감에 감탄하며 만족했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은 엉덩이가 끼이는지 좀 불편하다며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여행지 버킷리스트, 코끼리바지 가족유니폼

반바지만 고집하는 남편과 아이들도 코끼리바지를 입어야 날이 딱 하루 있었다. 여행 넷째 날, 방콕의 대표 관광지 왕궁과 사원 투어를 예약해 두었는데 이때  바지 착용이 필수였다.


뜨거운 건기의 날씨에 코끼리바지는 제법 유용해 보였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패턴의 멋짐은 물론이요, 공기를 걸친듯한 가벼운 소재감, 어떤 보디라인도 커버하는 넉넉한 사이즈까지. 다만 원가절감 차원 때문인지 주머니가 한 개라는 점만이 아쉬웠다.


출발하는 날 아침, 안 찍던 거울샷과 후미진 뒷골목을 런웨이 삼은 모습까지 흐뭇한 마음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 댔다. 그렇게 출발한 지 20채 되지 않아 보트 선착장 의자에 앉은 아들이 갑자기 난색을 표했다. 반바지만 입다가 긴바지 입으니 더워서 힘든가 보다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엄마, 바지에 구멍이..

-? 어디?!??

-(조용히 손가락으로 정중앙 아래쪽을 가리킨다)

-......


그렇다. 코끼리바지는 얇고 가벼운 대신 내구성이 매우 떨어진다. 통이 넓고 낙낙한 대신 신축성이 전혀 없다. 최고의 장점이 최악의 단점이 돼버린 것이다. 하필이면 사춘기라 예민한 아들의 바지에.

그 이후로 아들은 모든 순간 모든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졌다. 이미 실밥이 터져 구멍 난 바지는 조금만 힘을 주면 가차 없이 찢어질 테니까. 


급히 새 바지를 산다 한들 사이즈가 대부분 비슷해서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아들보다 더 크고 덩치 있는 서양인들의 코끼리바지는 도대체 어디서 샀을까. 체감온도 40도에 날은 덥지, 바지는 불편하지 몹시 힘들었을 텐데 아들은 어찌 됐건 잘 참아냈다. 그나마 투어가 끝나면 갈아입으려고 반바지를 챙겨 온 게 신의 한 수였다.

모든 사진마다 다소곳이 모으고 있는 이유가 있다

오늘 밤 비행기를 타면 6박 7일 여정이 끝난다. 코끼리바지는 한국 가서 잠옷으로 챙겨 입을 요량으로 싸두었는데 아들의 바지도 꿰매어 입어볼까 싶다. 건조기에 돌리면 어떤 모양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 가져가보겠다. 한국에서도 넘치게 살 수 있는 이 바지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진이 아닌 실물로 이번 여행을 기념하고 싶어서다.


이번 여행은 왠지 아이들이 돌봄과 챙김의 대상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진짜 여행메이트가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입맛 까다로운 딸을 위해 챙겨 온 즉석밥과 컵라면도 그대로 가져간다. 다치고 아픈 일 하나 없이 맛집 도장 깨기도, 관광지 투어도 다 이루었으니 바랄 것이 없다.


이제 아이들이 외국인 울렁증만 사라진다면 정말 완벽할 것만 같은데 말이지. 듣기만 완벽할 뿐 입도 뻥끗 안 하는 아이들의 말을 어찌 틔울까 싶다.


자, 사진 정리도 끝났고,

1시간 후면 돈므앙 공항으로 출발.



매거진의 이전글 새 학년, 졸업식을 기다리며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