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흠이 있었으니.
겨울방학의 끄트머리, 새 학기를 코앞에 두고 강추위를 피해 달아난 곳은 태국 방콕이다. 작년 가을쯤 항공권 특가의 유혹에 또 충동질되고 만 것이다.
허니문 이후 십여 년 만에 찾은 방콕. 이곳에 오면 꼭 사야지 했던 것은 바로 코끼리바지였다. 태국의 상징적인 동물인 코끼리를 모티브로 한 이 바지는 다양한 색과 패턴, 천상의 착용감이 특징이다. 전 세계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코끼리바지를 태국 사람들도 즐겨 입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관광객 티 팍팍 나더라도 가족 유니폼으로 입어보려고 일찌감치 쇼핑 목록에 올려 두었다.
방콕에서 코끼리바지는 노점이든 쇼핑몰이든 몇 걸음만 가도 볼 수 있을 만큼 지척에 널려있었다. 이름은 같아도 색깔과 무늬는 천양지차. 가격도 파는 곳에 따라 100밧에서 300밧까지 다양했다. 한국돈으로 대략 4천2백 원에서 1만 2천6백 원.
처음엔 200밧짜리만 보이길래 좀 더 싼 거 사보겠다고 미루고 미루다가 여행 셋째 날에야 120밧짜리 네 벌을 구입했다.
가족 모두 무채색을 선호하여 무난한 것으로 하되, 남다른 허벅지를 가진 아들을 위해 그나마 제일 큰 걸 찾고자 한참을 뒤적거렸더랬다. 숙소에 돌아와 입어보니 모두 다 편안한 착용감에 감탄하며 만족했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은 엉덩이가 끼이는지 좀 불편하다며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이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반바지만 고집하는 남편과 아이들도 코끼리바지를 입어야 할 날이 딱 하루 있었다. 여행 넷째 날, 방콕의 대표 관광지 왕궁과 사원 투어를 예약해 두었는데 이때 긴 바지 착용이 필수였다.
뜨거운 건기의 날씨에 코끼리바지는 제법 유용해 보였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패턴의 멋짐은 물론이요, 공기를 걸친듯한 가벼운 소재감, 어떤 보디라인도 커버하는 넉넉한 사이즈까지. 다만 원가절감 차원 때문인지 주머니가 한 개라는 점만이 아쉬웠다.
출발하는 날 아침, 안 찍던 거울샷과 후미진 뒷골목을 런웨이 삼은 모습까지 흐뭇한 마음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 댔다. 그렇게 출발한 지 20분 채 되지 않아 보트 선착장 의자에 앉은 아들이 갑자기 난색을 표했다. 반바지만 입다가 긴바지 입으니 더워서 힘든가 보다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엄마, 바지에 구멍이..
-응? 어디?!??
-(조용히 손가락으로 정중앙 아래쪽을 가리킨다)
-......
그렇다. 코끼리바지는 얇고 가벼운 대신 내구성이 매우 떨어진다. 통이 넓고 낙낙한 대신 신축성이 전혀 없다. 최고의 장점이 최악의 단점이 돼버린 것이다. 하필이면 사춘기라 예민한 아들의 바지에.
그 이후로 아들은 모든 순간 모든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졌다. 이미 실밥이 터져 구멍 난 바지는 조금만 힘을 주면 가차 없이 찢어질 테니까.
급히 새 바지를 산다 한들 사이즈가 대부분 비슷해서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아들보다 더 크고 덩치 있는 서양인들의 코끼리바지는 도대체 어디서 샀을까. 체감온도 40도에 날은 덥지, 바지는 불편하지 몹시 힘들었을 텐데 아들은 어찌 됐건 잘 참아냈다. 그나마 투어가 끝나면 갈아입으려고 반바지를 챙겨 온 게 신의 한 수였다.
오늘 밤 비행기를 타면 6박 7일 여정이 끝난다. 코끼리바지는 한국 가서 잠옷으로 챙겨 입을 요량으로 싸두었는데 아들의 바지도 꿰매어 입어볼까 싶다. 건조기에 돌리면 어떤 모양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 가져가보겠다. 한국에서도 넘치게 살 수 있는 이 바지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진이 아닌 실물로 이번 여행을 기념하고 싶어서다.
이번 여행은 왠지 아이들이 돌봄과 챙김의 대상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진짜 여행메이트가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입맛 까다로운 딸을 위해 챙겨 온 즉석밥과 컵라면도 그대로 가져간다. 다치고 아픈 일 하나 없이 맛집 도장 깨기도, 관광지 투어도 다 이루었으니 바랄 것이 없다.
이제 아이들이 외국인 울렁증만 사라진다면 정말 완벽할 것만 같은데 말이지. 듣기만 완벽할 뿐 입도 뻥끗 안 하는 아이들의 말을 어찌 틔울까 싶다.
자, 사진 정리도 끝났고,
1시간 후면 돈므앙 공항으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