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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정 Oct 11. 2023

프롤로그

어린 시절부터 모험을 동경했다. 책이든 만화든 영화든,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는 모호한 우주를 품고 있는 작은 마음을 한껏 달뜨게 했다. 상상 속의 모험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낯선 세계를 향한 발걸음이었다. 그 다부진 발걸음의 주인공에겐 언제나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집중되어 있었다. 여행과 모험은 흡사한 구석이 많았다. 실제로 둘은 쉽게 혼동되었다. 모험에 여행이 포함되기도 하고, 여행이 곧 모험이 되기도 했으니까.     


그토록 꿈꾸던 모험이 실현된 건 20세기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두서없는 호기심을 배낭 속에 욱여넣고 떠난 첫 번째 여행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놓여 있었지만, 일상의 많은 부분들이 아날로그에 치우쳐 있던 탓에 여행 역시 꾹꾹 눌러 쓴 손글씨에 가까웠다. 유일무이한 필체로 남겨진 글자들의 조합은 풋내를 풍겼다.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밑그림이었으나 당시엔 어떤 것도 상상하거나 계획할 수 없었다. 막연한 기대감과 불안감이 교차하는 지점을 서성이며 여행을 더 많이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는 것 외엔.      





21세기가 시작된 이후로 여행은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팽창했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까지도 아날로그의 범주를 벗어나진 않았다. 남들보다 늦게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한 탓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여행 스타일에 있었다. 시작이 배낭여행이었던지라 느림과 불편함은 여행의 기본값이었다. 게다가 난 뚜벅이었다. 대중교통 시스템에 맞춰야 하는 자에게 기다림은 필연이었다. 쾌적함은 있으면 좋은 것일 뿐,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경험과 낭만이었다. 원하는 것만 골라서 보고 들을 수 있는 스마트한 디지털 세계가 아닌, 다양성이 공존하는 따뜻한 아날로그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과정과 감성이었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면 평소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이후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다양한 삶들과 접속하며 매 순간을 강렬하게 누렸던 여행은 비우는 채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생을 토실토실하게 살찌웠던 경험은 청춘을 구성한 몇 개의 조각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내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어쩌면 이것이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여행과 관련된 부분만 건져 올리고 싶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몰랐던 것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경우가 있다. 나에겐 청춘이 그랬다. 사십대로 접어들고 나서야 시리도록 푸르렀던 봄이 찬란한 계절이었음을 고백하게 되었고, 흔들리고 넘어지며 혹독한 성장통을 견뎌낸 나를 토닥거려 줄 수 있게 되었다. 아날로그 여행자로 살던 시기가 공교롭게도 청년기로 정의되는 시기와 완전히 겹쳐져 있다는 점도 왜 하필 지금 건져 올려야만 하는가에 대한 그럴 듯한 답이 되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당시의 사진과 일기를 토대로 풀어낸 이야기 속의 나는 완전히 새로운 맥락 속에 대책 없이 툭 던져진, 무작정 걷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는 서툰 여행자였다. 지평선을 응시하며 뚜벅뚜벅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으나 그곳은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한 출발점이었다. 미지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은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이었다. 모험과 여행은 쉽게 혼동되었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인생은 모험이었다. 그리고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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