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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정 Oct 11. 2023

나홀로 나폴리

낯선 언어에 포위당한 형국은 유쾌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랄한 노랫소리도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치기와 호기가 빠져나갈수록 심장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모두가 들떠 있는 와중에 나만 홀로 가라앉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싶었으나 눈동자를 굴리는 것조차 어색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으면 마냥 자유로울 줄 알았건만, 현실은 예상을 거침없이 비껴갔다.  


로마에서 출발한 열차는 모든 역에 정차했다. 내리는 사람은 있어도 타는 사람은 드물었다. 결국 나폴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혼자 남겨지고 말았다. 텅 빈 객차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객차 안을 둘러보던 그는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짙은 눈썹 아래로 움푹 들어간 동그란 눈이 왠지 모르게 미심쩍어서 배낭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말을 처음에는 영어로, 다음에는 한국어로, 다음에는 손짓으로 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떠들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시선을 돌리며 배낭을 둘러멨다. 바로 그때, 번개 같은 손놀림이 내 선글라스를 낚아챘다.


그대로 달아났더라면 차라리 속편했을 것이다. 재수 없게 소매치기를 만났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선글라스를 써보며 히죽거렸다. 뻔뻔한 태도로 보아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르며 선글라스를 다시 뺏어왔다. 음침하게 깐죽거리던 그는 내 허리에 스윽 손을 댔다.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한 대 후려치고 싶었으나 일대일로 싸워봤자 불리한 쪽은 나였다. 더군다나 가방엔 여권과 현금까지 있었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던 터라 목에 핏대를 세우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풍부한 표현력을 가진 모국어를 두서없이 쏟아내면서.


잘못 건드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그는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뒷걸음질 쳤다.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꺼져!’라고 외쳤더니 그는 ‘차오!’라고 외치며 객차를 후다닥 빠져나갔다. 차오는 ‘안녕’ 또는 ‘잘 가’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였다. 이 와중에 인사라니. 얼빠진 채로 서 있는데 느닷없이 소름이 돋았다. 열차가 멈추면 플랫폼에서 다시 마주칠 지도 몰라. 중앙역에 진입한 열차는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멈출 듯 말 듯 감질나게 달리는 열차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완전히 멈추기 직전에 뛰어내렸다.      





역 앞에는 혼돈의 병풍이 펼쳐져 있었다. 예약한 숙소는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초행길인데다가 극심한 혼잡으로 인해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친구들과 여행할 땐 낯선 곳에 도착해도 당황스러움의 강도가 크지 않았다. 누군가가 곁에 있으면 부담감을 나눠 가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폴리는 달랐다. 무엇이든 혼자 감당하고 해결해야 했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음에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리저리 치이다 너덜너덜해질 게 뻔했다.


간신히 찾아간 숙소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허름했다. 창밖은 도시의 소음으로 요란했고, 문밖은 사람의 소음으로 어수선했다.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상태에 한숨이 나올 즈음, 앵앵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방충망이 없는 창문으로 향했던 시선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몇 마리의 모기로 옮겨졌다. 너무 더웠던 탓에 창문을 닫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숨 막히는 것보단 물어뜯기는 게 낫지. 삐걱거리는 침대에 누워 있으니 엔진 소리와 경적 소리, 목소리와 발소리, 고함소리와 노랫소리가 더 또렷해졌다. 조화롭지 않은 소리는 거슬렸다. 신경이 날카로워질수록 두려움이 커졌다. 혹시 누가 문을 따고 들어오는 건 아닐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오만가지 잡념에 시달리다 비몽사몽간에 아침을 맞이했다. 무사히 밤을 보내고 나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몽실몽실하게 피어올랐다. 흘러넘치는 의욕 덕분에 분주한 풍경 속으로 뛰어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나폴리의 이미지였다.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길 줄 알았던 도시는 청명한 하늘 아래서도 혼잡하고 지저분했다. 이게 아닌데.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지만 실망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돌아다니다 보면 괜찮은 장소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마음에 드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라.





살아온 날들도, 여행 경험도 적었던 나에겐 취향이라 부를만한 것이 없었다. 뭐가 좋은지도 모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선 유명한 관광지부터 둘러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도시를 상징하는 장소들, 이를테면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은 건축물이나 바닷물이 찰랑대는 항구는 경이롭거나 아름다웠다. 그러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우연히 발견한 장소들이었다. 작은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 빨래가 널려 있고 화분이 놓여 있는 테라스, 낡은 건물들이 마주보고 있는 후미진 골목, 활기 넘치는 노천 시장, 젊음과 학구열이 종횡으로 얽혀있는 대학교 건물까지. 일상적인 풍경이 신선하고 흥미롭게 다가온 연유는 알 수 없었으나 어렴풋이 깨달은 것은 있었다. 여행자의 시선은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정해진 코스에서 벗어나도 괜찮다는 것. 그 과정을 통해 여행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것.


길은 걸을수록 익숙해졌다. 아는 길이 늘어날수록 두려움은 줄어들었다. 도시의 일부분만 봤을 뿐인데도 날카로웠던 낯섦이 무뎌졌다. 구석구석 돌아보고 세심하게 관찰하고 느긋하게 감상하고 자유롭게 사유했기 때문이었다. 혼자가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시간을 마음대로 활용하지도, 충동적으로 움직이지도, 즉흥적으로 시도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랬더라면 나폴리가 편안해지는 순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잘하는 짓일까’라는 의문이 ‘잘한 짓이다’로 귀결되지 못했을 것이고.





나홀로 여행은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단한 일도,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세계를 자유롭게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결국엔 어떻게든 해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었다. 막상 시작하고 나면 할 만해졌고, 하다보면 나름대로 요령이 생겼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덤으로 주어졌다. 처음으로 혼자 떠난 곳에서, 혼자 떠나는 또 다른 여행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나만 준비되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는 그런 여행을. 나홀로 나폴리에서 나홀로 어딘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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