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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나이에 피아노를?

by 구가영




성인이 되고 나면 이상하게도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이 먼저 자리를 차지한다. 바쁘다는 이유와 돈이 아깝다는 이유. 그리고 ‘이제 와서 무슨..’이라는 생각이 묘하게 설득력을 가지기 시작한다. 취미는 사치가 되고 배우고 싶은 건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으로 밀려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온갖 핑계로 외면하기 바빴던 피아노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는 현실이 팍팍해 머릿속으로는 늘 ‘언젠가는’이라는 말을 붙였고 당연히 현실은 그 언젠가를 향해 단 1cm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 3월, 벚꽃이 만개한 어느 봄 날. 주말에 카페 테라스에서 책을 읽는데, 날씨는 화창했고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볼을 간질였다. 근데 그 순간 정말 갑자기 한 질문이 떠올랐다. “만약 지금이 인생의 마지막 1년이라면 피아노를 칠까? 아니면 여전히 바쁘다고 미룰까?” 그 질문에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게 대답은 확실해졌다. 이 날씨처럼 피아노로 내 인생을 아름답고 충만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런 인생을 만들기 위해 단 돈 10만 원이 아까운 게 아닌가? 한 번 외식하면 금세 사라지는 돈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때 깨달은 건,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에 쓰는 우선순위를 낮춰놓고 있었던 거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말자고 다짐하며 그날 바로 학원에 전화해서 상담을 받고 즉시 등록해 버렸다. 아무런 계획도 준비도 없이 말이다.






첫 피아노 레슨이 있는 날까지 설레서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딱히 뭘 한 것도 없고 피아노 배우는 시간을 기다린 것 밖에 없는데 가슴이 이렇게 두근거릴 일인가? 레슨 시간이 되어 피아노를 뚱땅뚱땅 치는데, 아니 치면서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나는 진짜 복 받은 사람이다. 피아노가 내 인생을 충만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음악으로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삶도 너무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공장에서 썼던 블로그 일기


레슨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면서 갔다. 이건 정말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내 삶을 다시 살아있게 만드는 작은 불씨라는 걸 스스로도 안 셈이다.



2년 전에도 공장 기숙사로 들어가기 위해 전자피아노를 팔아야만 했다. 뭐라도 팔아 빚도 갚아야 했는데, 그때의 피아노는 정말 말 그대로 사치였으니까.. 하지만 공장에서도 피아노가 너무 배우고 싶은 게, 잠들기 전에 예전에 쳤던 피아노 영상을 하염없이 봤던 날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다짐했다. 반드시 피아노를 다시 되찾는 날을 만들겠다고. 그 다짐이 간절해서 아무리 바쁘고, 돈이 아까워도 피아노를 시작하게 만든 것 같다.





세상에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루 종일 회사, 사회, 가정 속에서 누군가의 역할로 살아가지 않나. 나 역시도 피아노가 없었다면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누군가를 위해, 회사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나’라는 사람으로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내 인생은 피아노 덕분에 무료하지 않은 인생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도, 몸이 조금 불편해져도 피아노는 평생 옆에 둘 수 있다. 아주머니가 되어서도, 할머니가 되어서도 손끝이 기억하는 곡을 연주하며 혼자서도 시간을 풍성하게 채울 수 있다. 또한 감정을 예술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되어 말로는 풀리지 않는 감정이 손 끝의 힘으로 표현된다. 기쁨도, 슬픔도, 그리움도 악보 위에 얹어 음악으로 추억 여행을 할 수 있는 낭만적이게 살 수 있다.




성취와 자신감도 빼놓을 수가 없다. 매주 한 곡씩 완성할 때마다 작은 산을 하나씩 넘는 기분이 드는데 이 성취감은 다른 도전을 시작할 힘이 된다. 이미 피아노 하나 배운 것을 시작으로, 파티 기획, 콘텐츠 발행, 콘텐츠 코칭, 여타 부수익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작은 시작이 대체 뭐라고!





분명 까막눈처럼 뚱... 땅... 뚱.... 땅 치던 악보를, 시간을 투자해 매끄럽게 칠 때가 되면 나조차도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인생을 배운다. "맞아, 이게 인생이지. 처음엔 서툰 게 분명한데 꾸준히 계속하면 이런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다." 건반 위에서 배운 <한 박자씩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의 원리는 내가 파티를 기획할 때, 콘텐츠를 만들 때, 그리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처음이라 모든 것이 서툰 것을 알고 있었지만 꾸준히 했을 때의 나의 모습이 어떨지도 피아노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완벽해지면 하려는 아주 나쁜 습관을 고치게 된 것인데, 초보의 실력이라도 무턱대고 시작할 수 있는 마법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좋아하는 일은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해야 한다는 걸 알게된 사람이다. 덕분에 한 번뿐인 인생을 충만하고 낭만 있게 살 예정인데, 그중 하나가 아줌마 혹은 할머니가 되었을 때다.




지금 그 시간을 상상해 본다. 선선한 5월 혹은 9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야외에 아주 맛있는 음식을 한껏 차려놓았다. 그리고 그랜드 피아노 한 대와 주위에 은은한 조명들을 켜놓고 우아하게 감사 인사를 한다. 60년, 70년 간 살아온 인생으로 얻은 감정을 피아노로 연주한다. 캬.. 이 얼마나 낭만 있고 충만한 인생인가? 내 손끝에서 흐르는 곡들을 들려주는 나만의 연주회. 그 무대에 서 있는 나는 이미 나이 들었지만, 마음만큼은 여전히 첫 건반을 두드리던 그날처럼 설렐 것이다.



나는 한 번뿐인 인생을, 내가 좋아하는 삶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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