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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해하게 한 필름카메라 #1

by 구가영
이 사진을 찍을 당시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2019년 겨울, 혼자 필름카메라를 들고 서울역 출사를 나갔을 때다. 육교를 오르던 길에 낙서 하나를 발견했다. 계단 한켠에 누군가 적어놓은 문장.


"돈을 쫓으면 생명을 뺏긴다."


그때는 그저 재밌는 사진감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돈을 쫓지 않아서 삶이 버거워지니 변명하는 마음으로 쓰신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6년이 흐른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예전 사진들을 뒤적이다가 이 낙서 사진을 마주했다. 그리고 바로 이해해버렸다. 그동안 얼마나 돈의 많고 적음으로만 인생의 성공을 재단하고 평가했는지. 그렇게 함으로써 내 삶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겪어보니(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공장에 들어갔다), 이제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장소 다른 계절. 여름과 겨울에 찍었다.


낭만 있는 사진을 찍고, 피아노로 감정을 느끼고, 글을 쓰는 정서를 사랑하는 내가 돈에 미쳐 잘못된 길에 들어서 스스로 생명을 갉아먹던 시간을 겪었다.


덕분에 30대가 된 지금 이 사실을 온전히 깨달았다. 현재가 시궁창인 미래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현재를 기꺼이 사랑할 줄 알아야 미래 또한 꿈꾸는 대로 아름다울 것이라는 걸.


좋아하는 것을 제쳐두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되니 숨이 편안하게 쉬어진다. 모든 계절을 느끼고 사랑하며, 미래만을 바라보며 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을 깨닫게 해준 것 중 하나가 필름카메라다.



시골 풍경




사진과의 인연


"사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어릴 때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찍히는 것보다는 찍는 게 좋았고, 프레임 안에 무언가를 담아내는 행위 자체가 나를 설레게 했다.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글을 쓰듯이, 어릴 적 나는 사진을 찍었다.


15살에 첫 조카가 태어났다. 새언니가 사준 디지털 카메라를 손에 쥐고 나는 그 작은 생명을 미친 듯이 찍어댔다. 내 싸이월드는 어느새 조카 사진으로 가득 찼고, 돌잔치 날엔 내가 찍은 사진들이 벽을 채웠다. 사람들이 내가 찍은 천방지축 조카의 삶의 현장을 흐뭇하게 바라볼 때면 나까지 심장이 흐뭇해졌다.


서울의 모습


2019년 가을, 80년대로 떠난 시간 여행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었고, 2019년 가을, 나는 필름카메라를 알게 되었다. 송혜교, 박보검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남자친구"라는 드라마에서 박보검이 필름카메라를 들고 여행하는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저없이 인터넷 중고 거래 사이트를 뒤져 니콘 FG. 80년대에 만들어진 카메라를 구매했다.


그 뒤로, 당시 일주일의 단 하루였던 내 휴무는 출사가 전부가 되었다. 서울 곳곳을 3시간, 4시간씩 걸으며 계절을 담았다. 내가 사랑하는 노을을 어떻게든 담아보겠다고 빛이 있어야 찍히는 필름카메라의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찍으러 다녔다. 봄의 연둣빛을, 여름의 짙푸름을, 가을의 무르익음을, 겨울의 고요함을 전부 찍으러 다녔다.


배가 고프면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혼자 밥을 먹었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풍성했다.



열심히 사진을 찍다 허기지면 혼밥을 한다.




어렵게 찍은 가장 사랑하는 시간. 노을




나를 멈춰서게 한 것들




3일이 30일처럼 느껴졌던 첫 현상


처음 현상을 맡긴 날을 잊을 수가 없다. "3일 내에 파일로 보내드릴게요." 이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3일이 마치 30일처럼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길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 기다림이 좋았다. 너무 설렜다. 당첨될 복권을 손에 쥐고 있을 때의 그 감정과 비슷했던 것 같다. 이제 이 돈으로 뭘 하지? 라고 상상했을 때 느낀 감정을 그때도 느꼈다 (ㅎㅎ) 맥락은 다르지만, 그만큼 나를 기대하게 했다.


드디어 메일함에 현상 사진이 도착한 날. 혼자 방 안에 앉아 무릎을 끌어않고 내가 찍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


잘 찍었든 못 찍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시간이 거기 있었는데, 핸드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는 전혀 다른 무게였다.


필름이라는 소재가 가진 특별함이었을까.

번거로움을 기꺼이 선택하고,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사진들. 요즘 세상의 즉각적인 만족과는 정반대편에 서 있는 이 과정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미친듯이 설레게 했다.


봄과 여름


차라라라라랄칵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다 보면 셔터 속도를 느리게 해야 할 때가 있다. 어두운 곳이나, 움직임이 많은 순간을 담을 때. 그럴 때 나는 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찰칵"이 아니다.

"차라라라라랄칵"


이 긴 셔터음을 들을 때면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된다. 그 순간의 시간 전체가 내 카메라 안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빨려 들어오는 것 같은. 시간을 담는다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이구나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마법을 부리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세상에 나만이 존재하는데, 그때 홀로 존재하는 것이 전혀 외로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세상과 나. 자연과 나. 시간과 나... 아직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지 못해 답답하지만, 홀로 존재하는 데 홀로 존재하지 않는 그 기분을 느낀다.



길 위의 동물들




서울역 위 육교에서 만난 봄


겨울이 봄으로 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서울역 위 육교에서 필름 카메라로 앙상한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폰 너머로는 스티비 원더와 안드라 데이의 "Someday at Christmas"가 흘렀다.


그리고 뷰파인더 안에 들어찬 나뭇가지들. 그 사이로 아주 작은 연두색 봉우리가 보였다.


그 순간 아무 예고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짜 그냥 주르르르륵 흘러내렸다.


나 곧 울거야. 하는 순간도 없이 눈물 먼저 터져나온 경험을 그 때 처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혹독했던 겨울을 보내고 봉우리를 낸 나뭇가지의 모습이, 그리고 세상에 빛을 주는 가수 스티비 원더가 선사하는 따뜻한 노래가, 내게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너 괜찮아. 진짜 잘 될 거야. 세상 살 만해."하는. 그래서 그동안 참았던 버거움과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 아닐까.


지금 생각해봐도 기적적인 경험이었다. 시각과 청각과 촉각이 만들어낸 순간이, 마치 예술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한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그때의 사진이 없다. 갑작스런 눈물에 깜짝놀라 카메라를 내렸던 기억이 난다.


시간을 담고,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삶


훅 지나가버릴 순간을 한 스푼 떠서 눈으로 보고, 사진에 담는다. 시간을 내서 현상소에 맡기고, 조바심 내며 기다린다. 그리고 드디어 사진을 만난다. "아, 맞다. 내가 이런 순간에 있었지." 그때의 기억이 천천히 되살아난다.


또 시간이 흘러 우연히 예전 사진을 꺼내 본다. 그럼 또 기억한다. 그때의 날씨와 기분과 그날 들었던 노래를, 그날 먹었던 음식을, 그날 스쳤던 생각들을. 이런 과정들이 좋다.


차라라라라랄칵.


내 인생이

이런 순간들로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게 감사하다.


나이 들어서도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찰

내 인생이 참 괜찮다.


같은 날, 서울의 변화를 한 번에 담았다.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바라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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