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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카메라가 선물한 사람들

by 구가영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카메라와 필름을 챙기고 낯선 길로 나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있다.


이 글을 쓰는데 문득 심리학자 칼 융이 한 말이 떠올랐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타인과 진정으로 만날 준비를 한다"고.


필름카메라를 들고 혼자 걷던 길에서, 그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담는 사진, 느린 리듬 속에서 나는 비로소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동검도 장어집 할머니



동검도로 출사를 나갔던 겨울날이었다. 길을 걷다가 울타리가 쳐진 넓은 개집이 눈에 들어왔다. 네 마리의 개들이 저마다 따뜻한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겨울 추위를 걱정하는 누군가의 마음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카메라를 들어 올리는데, 한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셨다. 강아지들이 할머니를 보고 반기는 모습을 보니 주인이신 게 분명했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게되었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눈에 띈게 있었다. 바로 큰 배와 낚시를 하고 있는 동상이었다. 추운 겨울 날씨 때문인지 쓸쓸함과 그리움이 느껴지는게 너무 멋진 것 같다며 넌지시 얘기를 꺼내니..


“우리 남편이 만들었어. 아들이 군대 갔을 때, 너무 그리워가지고.”


군복무로 멀리 떠난 아들을 그리워하며 손수 만든 동상. 그 동상을 만드는 할아버지의 마음과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아들을 떠올리셨을 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졌다.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에, 사진을 찍어드렸다. 처음 만난 분이지만,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서 왠지 모를 가족간의 유대감이 느껴져 더 소중히 셔터를 눌렀다.


이날 혼자 걷던 길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했다. 우리 가족의 행복했던 시간이 떠오르며 엄마에게 전화했던 기억이 난다.





을지로에서 만난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



을지로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한 외국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는 한국을 정말 사랑한다고 했다.


“한글이 너무 예뻐요. 그리고 당신처럼 한국의 지나간 시간들을 좋아해요.”


묘하게 신기했다. 내가 미국의 80-90년대를 좋아하는 것처럼, 이 사람은 한국의 옛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 외국인을 통해 나를 보게 되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다음에는 함께 출사를 가기로 약속했다.



나중에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니 정말 모든 것이 한국의 모습과 한글이었다. 자기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의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 그 마음이 이해되었다.



사진소와 수리점에서 만난 시간의 주인들

필름현상소 사장님이 남겨주신 사진


서울역에 있던 현상소. 지금은 사라진 곳이지만, 내가 처음 필름을 맡긴 곳이었다. 벽면에는 옛 사진들이 촤르륵 펼쳐져 있었다. 사장님은 그곳에서 30-40년을 보내셨다고 했다.


현상을 기다리며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간 오고 간 손님들의 이야기, 사장님이 직접 찍은 사진들, 사진과 함께 흘러간 세월.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사진 찍는 것 그 이상의 무언가를 채울 수 있었다.


수리점 사장님이 다 고쳤다며 찍어주신 사진


카메라가 고장 났을 때 찾아간 을지로의 수리점도 다른 시대에 온 것 같았다. 건물 자체가 엄청나게 오래되었고, 70-80년대 양식 그대로였다. 내부는 온통 카메라로 가득했다. 쌓이고 쌓인 카메라들 사이에서 사장님은 오랜 시간 많은 카메라를 고쳐오셨다.


그곳에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들었다. 카메라를 고치러 온 사람들의 사연, 사장님이 겪어온 세월.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내가 필름카메라를 사랑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느껴졌다.



필름카메라를 들고 나서면 풍경만 담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함께 담아졌다. 동상을 만든 아버지의 그리움,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의 시선, 세월을 견뎌온 가게 주인들의 이야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 나섰던 길에서 만난 이 모든 만남들이 내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작가 헤르만 헤세는 "느리게 사는 사람만이 삶의 깊이를 안다"고 했다. 필름카메라가 강요하는 느림은 단순히 기술적인 제약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세상과 맺는 관계의 방식을 바꾸어놓았고, 서두르지 않으니 주변이 보였고, 멈춰 서니 사람이 보였고, 기다리니 이야기가 들렸다.


번거로운 취미지만 이 번거로움을 사랑할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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