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사실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과자 만드는 사람으로 살면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솔직히 터놓자면 그렇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내가 운영하는 겨울과 봄사이의 베이킹 수업에서는 꽤 자주 이 사실을 고백할 기회가 생긴다. 마음씨 좋은 수강생분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갈 때쯤 그날 완성한 과자들을 시식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높은 확률로 나에게도 과자를 나누시려는 시도가 있다. 우리 같이 고생하며 만들었으니 선생님도 드세요- 하면서. 이렇게나 따듯한 마음이라니… 하지만 거의 매번 정중히 거절한다. 양보하는 마음이 아니라 정말로 딱히 먹고 싶지 않아서. 그냥 솔직하게 얘기한다. 사실 제가 단 걸 별로 안 좋아해요-라고. 그러면 마치 반전 소설의 결말을 알아버린 것처럼 휘둥그레 놀라신다. 시식 시간이라는 건 세-네 시간 동안 계속해서 단 것들을 만지고, 섞고, 반죽한 다음 오븐 속에서 과자가 구워지며 내는 달큼한 공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서 더욱 그렇다. 그러고 나면 자연스럽게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왜 과자 만드는 사람이 되었는지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과자점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선옥은 허튼짓을 한다고 했다. 미술 입시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쎄빠지게 공부시켜 놨더니, 겨우 취직한 인테리어 회사를 1년도 채 안되어 그만두고 나온 딸에게. 장사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느냐고, 네가 그런 일을 할 사람이었으면 벌써부터 집에 오븐이며 작업대며 맨날 밀가루와 설탕을 뒤집어쓰고 있었어야 했다면서. 그런 말을 듣고도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단 것을 좋아해서 과자 만드는 사람이 되기로 한 것이 아니었다. 스물여섯의 나는 회사엔 죽어도 다니기 싫었고, 평생 혼자서 일하고 싶었고, 다행히 손재주는 타고나서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중에 할 수 있는 일을 고른 것뿐이었다. 별생각 없이.
선옥은 이 길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미 알고 있어서, 당신의 딸은 힘들지 않았으면 해서, 어떻게든 딸의 생각을 바꾸어보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겠지만 결국 나는 그 허튼짓이란 걸 했다. 선옥은 육십년을 살았고, 현명한 여성이어서 그녀의 말은 대체로 맞았다. 그런데 선옥의 딸인 나는 아직 덜 살았고 덜 현명해서 그런지 늘 직접 겪고 난 뒤에야 그 말을 이해하게 된다. 선옥은 그걸 잘 알고 있어서 이후로 딱히 반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하루에 12시간 넘게 서서 일하면서 갈려나가는 몸, 들쭉날쭉하는 매출 때문에 불안해지는 가계, 예상치 못한 손님들과의 갈등과 같은 것으로 뒤섞인 ‘짓’이었지만 그것이 정말로 ‘허튼’ 것이었냐고 묻는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별생각 없이 과자 만드는 사람이 되기로 했던 것처럼 별생각 없이 글 쓰는 사람도 되어보자 했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대부분 과자와 관련된 이야기더라. 과자를 만들다 울었던 이야기, 웃었던 이야기, 신기했던 이야기, 나에게 과자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과 내가 만든 과자를 사러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과자 만드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는 이야기, 과자를 만드는 사람을 딸로 둔 사람의 이야기, 또 과자 만드는 사람과 함께 먹고 자고 산책하고 늙어가는 강아지의 이야기, 또 과자 이야기, 과자 이야기, 과자이야기. 스물여섯의 나보다 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이를 아홉 살이나 더 먹어서일 수도 있지만 과자 만드는 사람으로 아홉 년을 살았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그간의 시간이 허튼짓이라곤 할 수 없을 테니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과자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