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와인에 감각이 열린 날
와인, 네 가지만 알아도 충분했던 시절
갑작스럽게 와인 자격증 공부를 하게 된 사연이 있기는 한데 그전까지는 와인과 특별한 인연은 없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사람들과 어울려 와인바에 가고, 가벼운 입문서 한두 권 보다가 책장에 꽂아둔 게 전부였죠.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지 물으면 ‘무똥 까데, 몬다비, 몬테스 알파, 빌라엠’ 네 가지로 “I’m fine, thank you. And you?” 정도의 소통은 할 수 있었어요. ‘좋아하는’ 와인이라기보다는 ‘이름을 아는’ 와인 네 가지로 불편함 없이 잘 지냈습니다.
와인 관능 테스트, 가능하려나
와인 공부하러 다닐 때 같은 반 동기들은 대부분 소믈리에가 되기 위해 자격증 취득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었고 와인 유통업 종사자도 있었어요. 저보다 훨씬 와인을 좋아하고 많이 접해본 사람들이라는 건 시음 시간마다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날 수업에서 배우게 될 품종으로 만든 다양한 와인을 수강생들이 먼저 맛보고 이후에 강사와 확인합니다. 그럴 때면 저마다 빼곡하게 작성한 테이스팅 노트를 보며 앞다투어 이야기합니다. 제 노트는 거의 깨끗했어요. 저는 ‘과일향’이라고 썼는데 강사의 모범 답안을 부지런히 받아 적다 보면 이런 시음 노트가 완성됩니다.
1번 와인 : 붉은 과일, 딸기, 라즈베리, 붉은 자두 향 (오크, 바닐라, 허브향은 없음)
2번 와인 : 복합적인 베리 향, 덜 익은 체리, 스모크 향, 정향, 로즈마리 향에 가죽 풍미
시음 노트만 봐도 맛있는 이 와인은 피노 누아로 만든 ‘시두리 산타바바라 카운티’와 ‘뉘 생 조르주’였습니다. 선명도와 강도는 바로 잘 알겠는데 당도와 산도의 기준은 제 입맛과 다르더군요. 공부라는 게 열심히 하면 성취감이 있어야 재미있게 마련인데 아무리 이론서룰 보고 품종의 특징을 암기한들 실전에 적용이 안 되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와인에 대한 감각이 열린 날
다섯 잔에 담긴 숙제를 풀어야 하는 시간이 또 찾아왔고, 첫 번째 잔의 와인을 한 모금 물고 가볍게 굴리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감각이 열렸습니다. 떠오르는 느낌을 열심히 적었습니다.
검은 자두, 피망 약간, 나뭇잎 향 조금, 바닐라, 토스트, 커피, 오크
이 신기한 느낌을 이어서 두 번째 잔을 시도했습니다.
진한 붉은 과일, 피망 조금, 민트도 약간, 유제품 풍미나 오크 향은 없음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감각이 열렸다는 확신과 함께 세 번째 잔을 테이스팅 합니다.
검은 자두, 베리, 바닐라, 유제품의 고소함 약간, 초콜릿, 담배, 훈연
모든 시음을 마치고 확인하는데 당도와 산도 수준, 후각, 풍미가 거의 일치했습니다. 틀린 것은 없었고, 몇 가지를 추가적으로 적었어요.
와인을 제대로 느꼈다는 사실이 어찌나 기쁘던지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다음 시간에 마주한 시음은 기대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맛은 있는데 표현이 잘 안되는 거예요. 아주 낯선 향과 맛도 아닌데 뭐라 설명이 어려웠습니다. 저의 시음 노트는 다시 한산해졌고 강사가 말하는 대로 받아적느라 바쁜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감각이 열린 줄 알았는데 왜 그런 거였을까요.
경험이 최고의 스승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품종은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였어요. 그리고 제가 가장 많은 메모를 적은 건 칠레 와인 두 가지였어요. 그동안 마셔본 와인의 품종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그 두 가지였고, 몬테스 알파가 들어온 이후부터 구세계 와인보다는 칠레 와인을 즐겼습니다. 경험이 답이었던 거예요. 맛에 친숙하니 표현이 어렵지 않았던 겁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
세 남자가 부르는 감미로운 세레나데가 와인을 부릅니다.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루이스 미겔, 손태진의 목소리에 어울리는 와인 페어링을 생각해 봐야겠어요. 그들의 목소리가 와인이라면 색상부터 아로마와 부케, 풍미, 피니시까지 아름답고 향기로운 관능 테스트 리포트를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b-cM-vjZ7h8
https://www.youtube.com/watch?v=xk0O35bcIFc
https://www.youtube.com/watch?v=0lCnkXdHSG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