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판델 #로제와인 #레드와인# 같은 품종 다른 느낌 #글렌 굴드
진판델을 처음 알게 되던 자리가 아직 선명합니다. 친구 한 명이 자신만만하게 와인을 주문했습니다. 색상이 어찌나 예쁘던지, 맛은 또 얼마나 상큼하던지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습니다. 추천한 녀석이 덧붙입니다.
"맛있지? 좋지? 이게 여자들이 좋아하는 와인이야. 레드와인하고 화이트와인 중간에 로제 와인이라고 있는데 진판델이 유명해."
말하는 녀석도 저도 당시에는 진판델이 품종인지 브랜드인지 알바가 아니었습니다. <진판델, 로제와인, 데이트>가 한 묶음이라는 정보가 중요했죠.
그런데 오래 즐기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예쁘고 상큼한 것보다는 옐로우 테일처럼 이미지가 느낌 있으면서도 깊고 묵직한 풍미가 좋았어요. 데이트할 때는 맛도 가격도 무거운 구세계 레드와인 찬스가 있었죠.
이렇게 진판델은 빌라 무스까델과 더불어 20대 중반 어린 입맛이 좋아하는 디저트 와인으로 남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와인 공부를 하면서 다른 면모를 알게 되었어요. 바디감도 좋고, 알코올 도수도 높고, 풍미도 매력적인 레드 와인을 그제야 만난 겁니다. 신선한 딸기향 대신 블랙베리, 푸룬, 건포도향이 감돌고 감초와 정향은 성숙한 달콤함을 품고 있었습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같은 사람, 다른 느낌
어떤 괴짜 피아니스트가 같은 곡을 두 번 녹음했는데, 젊은 시절에 연주한 것과 나중에 나이 들어서 연주한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 것 같으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녹음한 게 더 긴가요?" 사람만 보면 클래식에 대한 자신의 앎을 널리 알리기 좋아하는 지인이 대화의 물꼬를 트고자 던진 질문에 제가 어쩌다가 정답을 말했나 봅니다. 우물쭈물하면 그때부터 가르치기 시작하려던 계획이 엇나가자 어떻게 알았느냐며 되묻습니다. "글쎄요. 나이가 들면 대체로 느려지지 않을까요. 체력도 그렇고..."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널리 알려진 것은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연주 덕분입니다. 굴드의 고집으로 탄생한 이 음반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죠.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시 녹음했는데 두 연주가 너무 달라서 또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고 하네요.
"22세 때의 첫 음반은 연주시간 38분이라는 초스피드로 재기 발랄함을 뽐내는 반면 49세 때 친 두 번째 음반은 51분 동안 고독과 관조와 내적 성찰이 반영된 명상적 연주를 들려준다." (미주한국일보, 2024.05.01)
혹시 순서를 달리 해서 진판델 레드와인을 20대에 만났어도 그 묵직함을 좋아했을지, 40대에 화이트 진판델을 만났다면 가볍다고만 느끼지는 않았을지 생각해 봅니다. 고운 빛깔의 싱그러운 로제 와인을 20대에 만나고, 40대가 되어 진판델의 무게와 깊이, 풍미를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진판델은 변함없는데 제 나이를 닮은 모습에 마음이 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7EEACEefH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