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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빈 Aug 07. 2024

큐카드에 감춰진 비밀

# 모범 답안 손에 들고 시험보기 

발표할 때 암기 여부가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말씀드렸었죠.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읽어야 하는지 알려드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큐카드를 활용하는 방법을 말씀드릴게요.




무대 앞에 나 홀로 서 있을 때 오로지 의지할 수 있는 큐카드


남들 앞에서 온통 시선 받기, 남들 앞에서 말하기, 수십억 원의 계약 여부가 내 손에. 말만 들어도 스트레스받지 않으세요? 평소에 잘 하던 것도 제대로 못할 지경입니다. 그렇기에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최소로 하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저는 말하는 것 하나만 전문적인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 아니라 겉으로는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에너지 소모가 매우 커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현장에서 신경 쓰일 부분들은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여기서 잠시, 그렇게 긴장되고 어려운 일을 굳이 하는 이유가 뭔지 물으신다면, 답은 한 가지입니다. 성취감이에요. 긴장되는 만큼 무사히 잘 마쳤을 때의 짜릿함은, 정말 최고예요.


숫자를 애써 생각해서 읽는 것, 영문 표기 틀리게 읽을까 봐 우려하는 것조차 아까워서 사전에 모두 안정 장치를 마련합니다. 안 틀리고 읽기만 하면 되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현장 운영도 안정적으로 잘하게 돼요.


우황청심원보다 큐카드


저는 발표할 되도록 큐카드를 권합니다. 이런 조언을 드리는 대상은 주로 저에게 프레젠테이션 코칭을 의뢰한 분들입니다. 언제 적 스티브 잡스와 오바마가 아직도 스피치 롤 모델인데 현실은 정반대라 찾아오신 분들이죠. 그런데 저를 만나는 시점은 대개 발표까지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요. 촉박해서 걱정이 태산일 때죠. 아쉽지만 단계별로 꿈을 이뤄갈 것을 권해드립니다. 


외워서 발표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이라는 게 마이크에 대고 말만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걸 이내 깨닫습니다. 고려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면 암기할 시간도 없고, 행여 외웠더라도 제대로 발표할 여유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큐카드의 존재감이 커집니다. 현실을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시간을 아껴 많은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큐카드는 발표를 도와주는 멋진 소품입니다.


내용도 못 외우겠고 긴장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면서 큐카드 드는 건 반기지 않는 마음은 일종의 자격지심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발표를 망친 전력이 있거나 스스로도 발표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큰데 큐카드를 손에 들고 있으면 남들이 보기에 '얼마나 준비를 안 했으면 저걸 보고 읽을까' 여길 거라는 마음이 지배적이었던 거죠. 아무도 관심 없습니다. 오히려 큐카드를 잘 활용하면 전문 사회자처럼 보이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그렇다면 큐카드는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요?




1) 큐카드는 완벽한 대본입니다.


오늘 갑자기 내가 발표를 못하게 되어 옆자리 팀장이 대신하게 되었을 때 큐카드만 보고 읽어도 될만큼 모든 내용을 다 씁니다. 바디랭귀지가 필요하다면 연극 대본의 지문처럼 괄호로 표시해서 자세하게 써도 좋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발표를 하게 실버 컴퍼니의 은수빈입니다. 반갑습니다. 

(인사하고 청중과 잠시 아이컨택,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연단 앞으로 이동해서 자리 잡는다.)



2) 큐카드 한 장에 슬라이드 한 장


오프닝 인사, 소개, 목차처럼 멘트의 분량이 적은 경우는 큐카드 한 장에 다 넣어도 되는데, 설명이 많아지는 본론에는 큐카드 한 장에 슬라이드 한 장의 내용을 담는 게 좋습니다. 큐카드에는 슬라이드와 동일한 제목을 기재하시고 슬라이드 번호도 써주세요. 그래야 블랙아웃이 오더라도 큰 화면을 보고 바로 큐카드를 찾아서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니 발표하시는 내용의 분량에 따라 큐카드의 여백을 탄력적으로 활용하시면 됩니다.


3) 강조할 부분, 띄어 읽기 


강조해야 하는 부분에는 형광펜 등으로 하이라이트 합니다. 한 문장이 길어서 중간에 잠시 쉬는 우, 아니면 여러 가지를 열거해서 구분이 안 될 때는 큼직한 사선으로 구분해 주세요. 


4) 한글 독음으로 써두기


눈으로 보면 숫자의 규모가 한눈에 들어오지만 막상 입으로 읽으려면 까다롭습니다. 이때 한글 독음 그대로 큐카드에 써두면 유용합니다. 


"1,987,654원(백구십팔만 칠전육백 오십사원)이 부과될 예정입니다."


비록 쉬운 알파벳으로 구성된 영문 축약어라도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기에 한글로 옆에 다 써둡니다. 


FBI (에프비아이), CIA (씨아이에이), M16(엠아이 식스)


영어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한글 독음으로 써둔 것 같죠? :D 누가 봐도 상관없습니다. 저의 목적은 틀리지 않고 매끄럽게 저 단어를 발음하는 거니까요.


ICME-12 융합학문특별위원회


행사 사회 중에 등장한 단체명이었는데 ICME는 낯선 축약어라 IMCE로 말할 수도 있고 이거 하나 때문에 신경 쓰는데 소모되는 에너지조차 아끼려고 큐카드에 큼직하게 써두었습니다.


ICME-12 융합학문특별위원회 (아이엠씨이 - 십이 융합/학문/특별/위원회)


융합학문특별위원회라는 말도 명사마다 저렇게 사선을 그어놓으면 빨리 말하면서도 발음이 뭉개지지 않아요.




발표하는 시리즈의 글을 쓰면서 초반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그저 실무에서 프레젠테이션 할 기회가 많았는데 잘하고 싶어서 이것저것 찾아보고 공부하고 하다 보니 행사 사회자도 하고 프리젠터도 하고 지금은 코칭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쓰는 방법이 그다지 멋있지는 않을 수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진행할 때는 좀 멋있게 보이는 것 같기는 해요. :D


큐카드가 너덜너덜할수록 자신감은 높아집니다


깔끔한 발표와 달리 큐카드의 사정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본문은 강조해야 하는 포인트마다 알록달록 하이라이트에, 여백은 빼곡히 채운 메모로 가득합니다. 사람이 긴장하고 당황하면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저를 위한 안전장치로 모든 것을 써둡니다. 유치할 정도요. 무대에 섰을 때 제가 믿을 수 있는 건 큐카드밖에 없거든요. 혹시 슬라이드가 꺼지더라도, 너무 긴장서 흐름을 잊더라도, 큐카드만 읽으면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써둡니다. 


모범 답안을 손에 돌고 시험을 본다면 마음이 편하고 자신감이 생기겠죠? 너덜너덜한 큐카드, 평범한 제가 스피치 전문가로 보일 수 있는 비밀 병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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