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고양이 Oct 18. 2023

일본에서 '극우 교수' 만난 이야기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경험을 일본에서 하게 되었다. 일본의 모 대학으로 1년간 교환학생을 가게 된 것이다. 떠나기 전 상상한 일본 유학생의 삶은 이러했다. 고된 학업을 마치고 귀가하면 도쿄의 저녁노을을 보며 옥상에서 빨래를 넌다. J-pop을 들으며 일본이 어떻게 미국과 맞먹는 강대국이 되었나(그러다 다시 추락했나) 페이퍼를 쓰고 있으면, 비-루를 한잔 하자며 친구들에게 연락이 온다. 외지인의 달달한 고독을 달랜 후 일본의 고도를 만끽하며 집으로 걸어온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내가 가게 된 대학은 나름 명문대의 자부심을 가진 곳이었는데, 도쿄에서 살짝 외곽에 위치해있었다. 울창한 대자연에 둘러싸인 캠퍼스에는 거대한 호수가 무려 네 개나 있었다. 자전거를 타야 등교가 가능했고, 기숙사에서부터 수많은 언덕과 숲길을 지나야 수업을 듣는 건물이 나왔다. 당시 그 학교는 자살률이 꽤 높아서 방마다 내선전화도 놓여있었다. 일본에 온 첫날 기숙사를 안내해준 일본인 친구는 바로 옆 건물에서 불과 한달 전에도 사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필이면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때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문제는 다음날 새벽이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침대가 마구 흔들렸다. 자고 있던 침대가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잠결에 내 침대 아래에 뭔가가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은 옆 건물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는 얼굴 모를 학생의 넋이었다.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던 중, 선반의 컵이 떨어지고 나서야 이것이 지진이라는 걸 깨달았다. 알고나니 다음날 부터는 침대가 흔들려도 무섭지 않았다.


그래도 음산한 분위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학생들이 잘 적응하도록 챙겨주는 시스템이 탄탄했고, 국제학생 기숙사에서는 주말마다 댄스파티도 열렸다. 딱히 공부말고는 할 일이 없었던 터라 유학생 행사나 파티는 무조건 나갔다. 본의 아니게 영어와 살사댄스 실력이 늘었다. 운동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수영부에도 들어갔다. 나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을 배출한 전통의 수영부였는데, 운동 강도가 상당해서 이러다 익사하겠다 싶을 정도로 트랙을 돌고 또 돌았다. 수영부는 일주일에 한번씩 거하게 회식을 했지만, 새벽까지 멀쩡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나 뿐이었다. 수영부의 료스케는 내가 한국 이야기를 꺼내면 입버릇처럼 '일본도 10년 전에 그랬지'라고 말하곤 했는데,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보니 내 신발에 토하고 있었다. 그 녀석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말했다.


"다음엔 적당히 마셔. 너무 힘들잖아."

 

다른 유학생들이 영어수업이나 일본어학 수업 위주로 수업을 들을 때 나는 호기롭게 일본 학생들이 듣는 전공 과목들을 잔뜩 신청했다. 당시 국제학과 소속으로 들어갔지만 정치학과 수업을 많이 들었다. 일본을 움직이는 정치 리더들의 머릿 속이 궁금했다. 아니 머리 꼭대기에 앉고 싶었다. 미국의 권위있는 기관에 재직하고 돌아와 학생들에게 '천재'라 불리우던 모 교수의 국제정치학 수업도 일단 재빠르게 신청했다. 수강신청 기간이었음에도 첫날부터 본격 수업에 들어간 그 교수는  중간에 나가는 학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엄청난 양의 강의물을 쏟아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수업 중 이런 말을 꺼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다. 안그랬으면 한국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가 없었을거야.”


피가 거꾸로 솟았다. 백여명이 넘게 듣는 대형 강의였다. 다행히도 교실 뒷쪽에 앉아있긴 했지만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그 이후로는 수업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고서도 그냥 앉아있어야 한다니, 무력감마저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수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인원이 빨리 차는 수업이라 수강신청에는 성공 못하고 수강신청서에 서명해달라는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난 맨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십여 분 가량 기다린 후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내 손에 수강신청서가 들려있지 않은 것을 본 교수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까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다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저는 그 내용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교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유를 묻는 대신, '따라와'라고 말하고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건물 밖에는 화창했던 아침과는 다르게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교수는 커다란 검정 우산을 펼치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우산이 없는 나는 폭우를 그대로 맞으며 십여 분 정도를 걸어서 쫓아갔다. 빗줄기는 샤워기로 물을 뿌리는 것처럼 거세졌다. 나는 옷입고 샤워한 사람처럼 가방까지 푹 젖은 채로 그 교수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지금은 연구실 회의가 있으니 잠깐 기다려."


이번에도 내게 기다릴 수 있는지 의사를 묻지 않았다. 연구실 입구 바로 옆 방에는 일본 학생들이 회의를 하며 교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물에 빠진 사람 꼴을 하고 나타난 나를 보고 약간 놀란 것 같았다. 교수가 들어가자 문은 바로 닫혔다. 낯선 장소에서 추위에 떨며 삼십분을 앉아있었더니 뭔가 벌서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그냥 가길 바라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한국 학생들이 앉아있는 걸 뻔히 알면서 강의실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아무 항의없이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왔다. 교수는 따뜻한 차가 든 컵을 손에 쥔 채 책상에 앉더니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몇몇 학생들은 할 일이 있었는지 자리에 남아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추워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최대한 허리를 세우고 교수 앞자리에 앉았다. 교수는 지금부터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들으라며, 또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일방적인 강의였다. 아니 고압적인 설교였다. 요약하면 한국은 자본 축적, 정치사회시스템, 상업 그 모든 부문에서 대단히 뒤떨어져 있었고 가망이 없었단다. 하지만 일본의 덕에 지금 같은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단다. 외국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해가며, 화난 어조로 윽박지르듯이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한국은 감사한 줄 알아야하는데 늘 이런 식이야. 내 말 알아들었으면 이제 가 봐."


교수는 내 반론 따위는 허용할 생각이 없다는 뉘앙스를 내비치며, 책상으로 고개를 돌리고 컴퓨터를 켰다.


나는 가라는 말에 천천히 일어섰다. 그래도 한 마디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교수님, 말씀 아주 잘 들었습니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귀를 쫑긋했다. 나의 공손한 어투에 교수도 잠시 나를 쳐다봤다. 이때다. 뭐라도 말해야 했다.


"그런데 5천년 역사 속에서 일본이 한국보다 잘 산 기간은 기껏해야 50년입니다(당시는 2000년대 초반이었다). 좀 더 큰 틀에서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교수님 수업은 신청 취소하겠습니다."


그다지 정교한 반론은 아니었지만 정교하게 반박할 분위기도 아니였다. 후다닥 대사를 마친 후, 나도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재빨리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한방 후려맞고 멍한 표정으로 내 뒷통수나 쳐다보고 있으라지. 그러나 태생적 모범생인 내가 ‘교수님’을 상대로 그렇게 말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추위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걸어가는데 몸이 덜덜 떨렸다. 미친듯이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눈물인지 빗물인지가 얼굴 위로 주륵주륵 흘렀다. 서럽고도 막막한 심정으로 내 자전거가 세워져있는 곳까지 걷고 또 걸었다. 유학생 클럽에서 몇번 만난 프랑스 학생이 자전거 자물쇠를 풀다가 나를 발견했다.


"왜 이렇게 비를 맞고 다녀? 날도 추운데 감기 걸리겠어. 우산 안가져온거야?"


그러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우는 거야? 무슨 일 있어?"


나는 토끼처럼 빨개진 눈을 하고 말했다. 너무 열받아. 미친 교수가 수업 중에 이렇게 말해놓고, 연구실로 불러서 갔더니 자기 할 말만 쏟아내고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아. 그리고 덧붙였다. 그 교수는 우산 있었는데 자기 혼자 쓰고 갔어. 나쁜 놈.


프랑스 친구는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듣더니, 갑자기 너털 웃음을 쏟으며 말했다.


"아 나도 아까 그 수업에 있었는데 너도 있었구나. 난 너무 재미없어서 취소하려구. 그리고 일본애들이 그러는데  그 교수 극우 성향으로 엄청 유명한데 성격이 좀 이상하대. 여기 교수들 사이에서도 외톨인가봐. 너무 신경쓰지마. 그래도 따라갔다니 대단하네."


그러면서 윙크를 하더니, 흰색 셔츠 입고 비맞으면 너무 섹시하니 빨리 들어가서 쉬라고 덧붙였다. 갑자기 실없는 농담에 나도 긴장이 풀어져 허허허 웃고 힘없이 자전거를 탔다. 그리고는 집으로 가는 길에 결국 사고가 났다. 언덕의 내리막길에서 자전거가 빗물에 미끄러진 것이었다. 첫번째는 그냥 적당히 넘어진 정도였는데, 두번째 사고는 내리막길 커브에서 자전거 바퀴가 거의 공회전을 해버렸다. 난 자전거와 함께 공중으로 붕 뜨다가 자전거와 함께 진흙탕에 곤두박질을 했다. 무릎 통증이 너무 커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끙끙거렸다. 진흙 투성이가 된 몸 위로 빗줄기가 쏟아지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곳은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가. 엄마 보고 싶다. 한국이면 택시타고 집에 갈 수 있을텐데.


그 때 언덕을 넘어오던 일본 학생 두 명이 진흙 위에 쓰러져있는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괜찮아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켜보았다. 한시간 가까이 비를 맞은 다음 두번째로 바닥에 처박힌 상태여서일까. 다리 한쪽에 아예 힘이 안들어가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결국 한 명은 나를 부축하고, 나머지 한 명은 내 자전거를 기숙사까지 옮겨주었다. 그 날도 일본은 미워하되 일본인은 미워할 수 없는 하루를 보낸 셈이다. 돌이켜보면, 다른 일본인 교수들은 한국 학생에게 그렇게 혐오스런 태도로 대하지 않았다. 역사에 무관심한 일본 친구들은 있었지만, 한국인에게 무조건 적대적인 일본 친구 또한 (내가 운이 좋았던지)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 극우 교수는 일본 사회 어디에나 있을 법한 실재하는 인물임을 부정할 순 없었다. 나는 더욱 공부에 매달렸다. 아침마다 요미우리 신문을 보고, 수업 준비를 했다. 수업에서는 맨 앞줄에 앉아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했다. 학기 말에 치러진 모둔 정치학 과목 시험에서 A를 받았다.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외국 학생이 와서 아등바등 공부하고 있으니 그 성실함에 부여한 점수였을 것이다. 나로서는 수업에 적극 참여시켜주신 교수님들이 너무 고마웠다. 내가 속해있는 캠퍼스에 멀쩡한 사람들, 정상적인 교수님들이 더 많다는 믿음이 유지되는 것은 중요했다. 그 날의 처참한 기억을 딛고, 남은 일본에서의 기간 동안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나답게 만들어가기 위해 그 믿음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전 01화 절대반지를 잃어버리면 생기는 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