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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고양이 Oct 13. 2023

내 삶은 언제나 파티이기를

일탈(1)

90년대 후반의 캠퍼스는 찬란하면서도 비장했다. 비장했던 전투적 과거의 끝자락을 간신히 부여잡고, 소위 마지막 운동권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학생운동의 파고를 직시하면서도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전세가 기울 때는 원래 현실을 인정할 용기를 내기 힘든 법이 아닌가.


내가 다니던 캠퍼스는 언덕길 경사가 심하기로 유명했다. 여학생들은 구두를 신고도 잘 걸었는데, 경사진 비탈을 오를 때에는 뒷굽이 있는 신발이 사실 편했다. 트위드 가디건을 입은 긴 생머리의 여학생들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두꺼운 원서를 껴안고 캠퍼스를 누볐다. 세상의 모든 생기와 호기심, 발랄함이 한군데 모여 화산처럼 분출되는 것만 같았다.


학관 앞 비스듬한 언덕에서 반쯤 누워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캠퍼스를 등지고 하루종일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담배를 피며 고뇌하던 이들도 있었나니, 그 중 한명이 나였다. 그 당시 나는 수업은 꼬박꼬박 나가는 성실함을 무기로 일반 학생들과는 다른 삶을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었다. 다른 삶이란 바로 아침 8시쯤 학생회실에‘출근’해서 저녁 10시에 ‘퇴근’하는 빡센 삶이었다.


당시 학생회는 철마다 개최하는 갖가지 이름의 집회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백 명도 넘게 운집할 것을 열 명도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무리 멋지게 행사제목을 지어내고 갖가지 방법으로 꼬드겨도 그 이상의 인원을 모으지는 못했다. 그러나 더이상 건물 꼭대기에서 전단지를 뿌리고 구호를 외치다 머리채를 잡히고 끌려가는 총학생회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몰래 배회하며 우리의 언행을 감시하는 사복 경찰도 없었다.


가끔 집회 신고를 하면 능글맞게 전화를 걸어오는 ‘김형사’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와 우리는 필요한 정보를 교환해야 하는 악어와 악어새 같은 협력관계였다. 소위, 죽창으로 맞서며 구속을 각오하면서까지 싸워야 하는 '절대악'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곳곳에서 분신과 자살, 갑작스런 연행 소식은 끊이질 않아서 우리를 우울하게 했다.


선배들과 나는 미완의 민주주의를 둘러싼 논쟁 그 어딘가를 부유하며 끝도없이 지쳐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도착 지점을 모르는 채 달리는 이들에게 쉼과 재정비가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수년전 보다 나아진 세상 앞에서 부끄러움만 곰씹었다. 아직 좋은 날이 오지 않았다고 믿어야 했다. 십년 전과 달라진 장면이라면 학생회실에서 배달음식을 시키면서 과거 반미 운동가들이 '양키의 썩은 물’이라고 비난했던 콜라를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는 정도였다.


가끔 새벽 두세시까지 길고 긴 마라톤 회의를 하고 대자보까지 쓴 후 집으로 가는 길의 기분은 처참했다. 우리의 회의 내용은 그 누구의 정곡도 찌르지 못했다. 80년대 선배들이 하던대로 이렇게 열심히 하면 빛의 속도로 열심히 추락할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에 늘 울적했다. 그런 날은 대운동장을 들르곤 했다.


대운동장은 규모가 꽤 커서 5월 축제가 되면 만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이 다 같이 모여 달빛 아래 강강술래를 하던 곳이다. 모두가 다함께 손을 잡고 달빛 아래 거대한 원을 뱅글뱅글 그리면서 오는 희열.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어서 밤 10시쯤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도 운동장으로 잠시 내려오게 할 정도의 매력이 있었다.


화려한 축제의 기억을 머금은 운동장에 텅빈 어둠만 깔려있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땅이 꺼지는듯한 무거운 침잠은 아니었다. 오히려, 축제와 만남, 삶 그 모든 것에는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임을 다시 느끼며 얻게되는 편안함이었다. 모든 것을 아는 척 하느라 지쳤던 나를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느끼게 되는 삶에 대한 겸허함이랄까.


5월의 달빛이 흘러넘치고 수천명의 환희와 함성으로 가득찼던 그곳이 바로 이 어둠만 가득찬 운동장이구나. 새하얗고 은은한 달빛 아래 벌레 소리조차 없는 정적 속에서 문득 깨달음이 왔다. 축제는 언제나 끝나고, 삶은 언제나 다시 시작된다. 그러므로 삶은 늘 축제의 장이어야 한다.


그렇다. 생각해보면,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삶의 구석구석을 오롯이 성찰하며 어둠 속에서도 1%의 긍정을 찾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삶이 위대한 이유 중 하나는 기쁨의 순간만 있기 때문이 아니다. 늘 괴로운 순간 뿐이지만 그 순간을 어떻게든 사랑하고 즐기는 데 있지 아니한가.


그날 밤, 심연을 내려다보던 나는 고뇌에 찬 학생운동가의 무거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잠시 축제의 시간을 내게 허락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부리나케 학교 자유게시판을 검색했다. 다양한 아르바이트 게시글 속에 내 눈을 강타한 글이 마침 하나 있었다. 바로 당시 유명 걸그룹을 배출한 모 회사의 오디션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꽉 막혀있어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다고 느꼈던 날들이었다. 그래서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와 함께이든, 내 삶은 내가 마음을 먹으면 아주 잠시라도 파티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걸 확인하지 않으면 숨이 막힐것만 같았다. 마음이 급했다. 그런 내 심정과 딱 맞게, 마침 그날 오후에 오디션이 잡혀있었다. 나의 전투복은 소속된 단과대학 구호와 행사명이 적나라하게 적혀진 티셔츠와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였고, 나는 망설임 없이 출격했다.


강남 모처에 있는 오디션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수십여 명의 가수지망생들이 모여 있다는 데 놀랐고, 그들이 그날의 테마가 발라드라는 것을 어떻게 미리들 알고 있었는지 모두 눈물나게 슬픈 발라드를  각자 두 곡씩 불러제끼는 데에 놀랬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 실력은 하나같이 출중해서 이미 저들은 가수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문제는 내가 그들처럼 가사를 아예 안보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노래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필승’과 ‘교실이데아’ 뿐이라는 점이였다.


“준비 되셨나요? 혹시 반주곡 저장해오셨으면 주세요. 틀어드릴게요.”


“아니요. 반주곡은 없습니다.”


“어떤 노래 부르실 건데요?”


“필승이랑 교실이데아요.”


순간 그 방에 있던 모든 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듯한 정적이 느껴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자리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파티가 아닌가. 이 순간은 내가 주인공이 아닌가 말이다. 안내요원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안쓰럽다는 듯이 그 노래들은 반주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럼 그냥 부르겠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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