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고양이 Oct 19. 2023

무례한 이가 '너는 누구냐' 물어온다면

상대방의 이름과 소속을 알고 싶으면 보통 자기 소개를 먼저 하기 마련이다. 너의 정체를 밝히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부터 공손히 말하는 것은 인간이 짜놓은 위대한 시스템이다. 그렇지 않으면 야만이자 폭력이 된다. 자고 있는 사람 얼굴에 손전등을 들이대며 다짜고짜 어느 편인지 말하라고 강요하던 전쟁의 시대는 지나지 않았는가. 군대에서 하는 경례의 기원도 '내게는 무기가 없다'는 비언어적 표현, 중세 유럽의 기사들이 헬멧의 바이저를 들어올리며 같은 편임을 보여주는 행위라고 하지 않는가.


나를 소개하며 내가 너를 해칠 의도가 없음을 알린 다음에야 너를 알려달라고 하는 것. 이는 문명에 기반한 안전확보용 자동응답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러한 룰이 적용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첫번째 순간은 지금은 천지개벽한 서울의 한 철거 지역에서 일어났다. 당시 이 곳은 야트막한 판자집, 비좁은 골목길, 작은 음식점들이 가득했다. 이 곳의 개발자들은 소위 '용역깡패'를 앞세워 기습적 강제 철거로 남은 주거지를 밀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각 학교 총학생회들은 재빨리 철거민들을 돕기 위한 인원을 투입했다. 곳곳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주민들과 함께 골리앗 망루를 세우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 동안 철거용역들은 더 이상의 인원이 안쪽으로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입구를 봉쇄하고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일정이 있어서 다른 이들 보다 늦게 도착한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사람들이 모인 곳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을 쭈욱 올라가기만 하면 선배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는 더운 여름, 학교 이름이 영문으로 큼지막하게 써있는 배낭을 메고 헉헉거리며 언덕을 올랐다.


전단지와 현수막의 무게를 느끼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자 점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보인 것은 사람들의 머리, 그리고 수건으로 눈 아래 부분을 가린 얼굴들. 그 다음에는 그들의 손에 쥐어진 쇠파이프와 각목들이 보였다.


언덕을 완전히 올라오자 그들 모두 나를 응시했다. 난 가쁜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강제철거에 대비해 모여있는 학생들인가 했지만, 검정색 위주의 복장에 무기를 들고 있는 수십명의 남성들이 도저히 학생들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너 뭐야."


너는 누구냐도 아니고 너는 무엇이냐라고 묻다니. 영어로 치면 '왓 알 유' 같은 것이었다. 딱히 뭐라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쇠파이프를 지익 끌면서 내 앞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보니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 차마 '철거민들 투쟁을 돕기 위해 모 대학에서 지원나왔습니다' 라고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왜들 이러시오. 사람이 살던 집을 강제로 부수면 저들은 어디서 살란 말이오' 라며 길을 비키라고 말할 배짱은 더더욱 없었다. 길을 잃었다고 말하자니, 이 근처에 외지인이 갈만한 곳도 딱히 없었다.


대답을 못하고 당황하자 내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둥그렇게 모이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철거 담당 용역깡패를 눈 앞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소식지에서나 보았던 잔인하고 폭력적인 용역깡패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 과정에서 구타당하고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 병원에 실려간 철거지역 주민들. 일단은 여기를 빠져나가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가지.


'여기 뭐하러 왔어?'


그가 한번 더 사납게 물었다. 나는 질문의 답을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가까스로 질문으로 답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ㅇㅇ정류장이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답이 쉬운 질문이었다. 백미터 내려가면 바로 있는 그 정류장의 이름. 자 이제 답을 말하고 싶지 않은가. 정보혁명의 시대에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나눠주고 싶지 않은가 말이다. 문명의 코드를 잊어버린 이들에게 '인사'라는 선물을 안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도 울며 겨자먹기로 이 자리에 나왔을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들기는 철거민들과 매한가지로 힘들어보이는 이들. 오늘 일당 몇만원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타들어가는 불볕 더위에 긴팔 긴바지 복면까지 하고 싸워보겠다며 내 앞에 서있었다. 삶이 갑갑하겠지. 나를 괴롭힐까 때릴까 고민하는 것 보다 나에게 친절하고 싶겠지. 그러니 제발 내 가방을 열어보겠다고 하지 말고, 정답을 맞춰주길 간절히 바랬다.


"여기까지 올라오면 길을 잘못 든거지. 반대로 내려가야 하는데.'


정답을 맞힌 사람은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아저씨였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덧붙였다.


'아가씨 이 쪽은 이제 올라오면 안되요. 어차피 여기서부터는 막혀있어서 더 못가.'


난 길을 잘못 든 자의 허탈한 표정을 지은 다음, 인사를 꾸벅하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목에서 다른 선배와 마주쳤다. 그쪽은 중앙 출입구라 그쪽으로 가면 안된단다. 핸드폰 없는 시대의 비극이었다. 다른 샛길로 돌고 돌아 낡은 성당같은 건물 지하실로 들어갔는데, 그 건물의 3층 출구가 철거민 집합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바깥으로 나있는 낡은 계단을 거의 포복하다시피 올라갔다. 가는 길 아래로 철거용역들이 살짝 보였다. 지금 저들의 눈에 띄면 큰일날 것 같아서 숨을 죽이고 벽에 붙어서 올라갔다.


숨죽이며 오르는 길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해준 사람이 보였다. 그는 마스크를 내리고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고 있었다. 밑도 끝도 없이 오늘밤이 모든 이들에게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날 집회에서는 구호를 외치고 순번을 정해 골리앗을 지킬 인원을 정한 다음, 저녁 무렵에 충돌없이 해산했다. 유혈 충돌이 없었다는 것에 그저 안도하고 만족한 밤이었다.내가 아는 기간 동안 그 지역에서 사상자는 없었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고단한 이들간의 전투, 잃을 것이 없는 이들간의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생각하게 된다.


두번째 순간은 사회초년생 시절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서울 중구의 한 기관에서 처음으로 인턴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 있다가 바깥 세상으로 나와 사회생활을 한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짧고 굵게 인턴생활을 제대로 해보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다만 내가 속한 부서의 팀장님은 다른 부서와 소통이 거의 없고 과묵한 보스였다. 사무실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조용히 할 일을 한 후 퇴근을 하는 스타일. 그것이 화근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보통 새로 직원이 오면 근무지를 한바퀴 돌며 인사를 시켜주는 것이 정석일 터였다. 그러나 팀장님은 나를 업무에 필요한 몇몇 부서에만 소개를 시켜주었다. 나머지 부서 사람들은 워크샵에 가서 한꺼번에 인사하기로 했다.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한지 한달이 다 되도록 내가 맡은 과제는 다른 팀과 협업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여느 때처럼 컵을 씻으러 건물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뒤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이리 와봐!"


너무나도 당연히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갑자기 큰 소리가 나길래 살짝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나에게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너 뭐하는 놈이야. 내가 몇일 전부터 지켜봤는데 너 딱 걸렸어. 우리 사무실에 들락거리면서 뭐 가져갔어! 너 우리 기관 사람 아닌 거 내가 확실히 아는데, 남의 사무실은 왜 기웃거려. 너 뭐하는 놈이냐고!"


마치 강력계 형사가 잠복하다가 범인이라도 잡은 것처럼 기세등등한 목소리였다. 우리 사무실 뿐 아니라 다른 사무실의 사람들, 엘리베이터에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복도 쪽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나와 그 남자를 쳐다봤다. 인턴으로 일한지 한 달도 안되어 도둑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건 새내기 인턴이 감당할 수 있는 레벨을 넘어서는 황당함이었다. 나의 뇌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순간적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


이 무례한 사람을 어떻게 무찔러줘야 하나. 일단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장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부끄러움은 그의 몫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극우 교수의 뒤통수에 메롱을 날리고, 용역깡패 수십명과의 대결에서 정보전에 기반한 교란작전으로 목숨을 부지한 자가 아닌가. 야만의 방식으로 그를 처단하기엔 이미 난 문명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와(그 자식과) 나의 존엄을 택하기로 했다. 쌍욕을 날리는 대신, 나의 정중함 레벨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로 순간 마음을 먹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댁과 같은 기관인) ㅇㅇㅇ에 새로 들어온 인턴 ㅇㅇㅇ입니다. 저희 팀장님께서 이번주까지 좀 바쁘셔서 아직 인사를 못드렸습니다. 다음주 워크샵에서나 인사를 시켜주실 것 같은데, 너무 늦어져서 어쩌지요.“


말을 잇지 못하는 그 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내친 김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활짝 웃으며 악수도 청했다.


"너무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 사람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며 악수를 하고 어 어 하면서 혼잣말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흥미롭게 이 광경을 구경했다. 그의 수줍은 인사를 받고 나서 컵을 씻으러 가는 길에 생각했다. 설령 내가 다른 사무실에서 커피믹스를 집어가려고 몰래 들어온 누군가라고 치자. 내가 그런 식의 대접을 받는 것이 옳은가.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사람도 사실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얼굴이 빨개진 것 아닐까.


사무실로 돌아가 팀장님께 방금 있었던 일을 전하자, 팀장님은 황당해했다. 그 사람은 그럴 법도 하다는 묘한 말로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워크샵에서 다시 마주친 그 사람은 내 앞에서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 이후에 본인 부서의 회식자리에 나를 불러 다시 사과를 했다. 그 이후에도 수차례 미안함을 표시했다.


그 날 복도에서의 경험은 참으로 불쾌했지만 나라도 야만의 방식을 택하지 않길 잘했다. 지금은 그 기억이 전혀 불쾌하지 않다. 그 때 면박을 주었더라면 그런 진심어린 사과를 못받았을 것이고 나도 그 사람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우린 무례함과 야만이 아닌 존중과 문명을 선택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쉽진 않지만 분명 가치있는 선택이다.



이전 06화 안녕, 세상 최고의 고양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