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1)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을 보고 있자니 전쟁의 참혹함, 그리고 그 내밀한 속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다행스럽게도 지난 수십년 간 전쟁이 없는(멈춰져 있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백만명 넘게 사망한 한국 전쟁을 겪은 나의 부모님 세대는 어떻게 전쟁을 버텨냈을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앞사람을 밀치며 자리를 확보하려는 어르신들을 보면 전쟁 경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 배를 타지 못하면 불바다가 된 도시에서 타죽거나 북한군에게 죽임을 당해야 한다. 앞에 가는 사람 보다 먼저 자리를 확보해야 했던 시절, 아비규환의 흥남 부두. 비록 직접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한 다리만 건너도 북에서 고향을 떠나온 가족이 있는 우리나라. 전쟁은 남 일이 아닌 것이다.
난 전쟁 경험을 한 적은 없지만,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여할 것인지를 두고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것은 목도한 바 있다. 바로 이라크전 파병에 대한 찬반 논란이다. 그야말로 한국 사회는 '국론대분열'을 겪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본토에서 뉴욕을 상징하던 110층 건물이 테러 공격으로 인한 화염에 휩싸인 것이 시발점이었다. 전 세계는 실시간으로 이 충격적인 장면을 지켜보았고,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2001년에는 9.11 테러 배후인 알카에다가 은신한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였고, 2003년에는 이라크 정부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다. 이라크전 직전인 2002년, 미국 정부는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꼽았기 때문에 한국의 외교적 입지는 좁았다. 명분없는 침략전쟁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우리나라 정부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고 한국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진보와 보수진영은 이라크 파병 찬반 여부를 둘러싸고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이라크 파병 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고 나중에 파병 연장안이 상정될 때에도 양측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한 대결을 펼쳤다. 전쟁은 이라크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한국 정치도 전쟁 상태였다. 전쟁은 유혈정치이고 정치는 무혈전쟁이라고 했던가. 심지어 보수와 진보 내부에서도 이념적 성향에 따라 첨예하게 의견이 갈렸다. 논란의 핵심에는 '국익' 이라는 키워드가 있었다. 이라크 전쟁 파병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를 둘러싼 논란은 칼과 방패의 대결처럼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보수 진영은 우방국인 미국에 협력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미국 조차도 이라크 군사공격을 둘러싼 국론 분열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미 행정부 내에서도 국방부와 국무부간 이견이 맞서고 있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민 지지도가 아프간 전쟁의 절반 수준이었으니. 한편, 진보 측에서는 무엇보다 외국에서 벌어지는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 군대를 보낸다는 것에 분노했다. 대한민국은 국제평화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한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냐며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전기톱, 해머, 빠루, 소화기가 등장하는 한국 국회. 늘상 극단적 갈등 양상을 보여오긴 했지만, 대부분 국내 사안이 소재였다. 전쟁의 뼈아픈 역사가 있는 우리나라가 이라크 참전 여부를 둘러싸고 그야말로 내전이라도 겪는 모양새였다. 이라크 전황이 심상치 않게 기울어가자 대통령은 명분이 아니라 국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음을 강조했다. 전후복구 사업에 참여해서 천억 달러 이상의 건설시장, 자동차, 전자제품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땅만 파면 원유가 나온다는 나라 이라크에서 전쟁이라니.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는 군대를 파병한 김에 석유개발사업에 적극 참여해서 안정적으로 원유를 확보해야 한다. 이는 가장 호소력 짙은 '국익' 논리였다.
이라크 전쟁의 내밀한 속사정도 이러한 '국익 셈법'과 맞닿아 있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모토로 내건 미국이지만 이라크전을 통해 석유산업과 군수산업의 패권을 강화하려 했다. 이것은 '모토'로 내걸 필요 조차도 없는 이라크 전의 '목표' 그 자체였다. 미국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이용해 국제석유시장의 헤게모니를 강화해 나갈 터였다. 미국의 항공모함 12척은 원유수송로에 놓여있고, 미국의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은 국제적 석유 메이저들의 로비 대상이다. 당시 미국의 현직 부통령이 보유하고 한때 CEO까지 지냈던 세계적 석유기업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라크 유전 프로젝트를 따낸 상황이었다. 다른 나라라고 이런 목표에서 예외겠는가. OPEC 2위 원유생산국인 이라크의 석유자원 확보(그리고 원유가격 안정)를 위해, 미국 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나라가 물밑 흥정을 하고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나라도 복잡한 셈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가치가 동원된 깊고도 난해했던 국익 논쟁. 십여년이 지난 지금, 마침내 우리나라는 그 국익을 달성했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한미동맹이라는 총체적 국익은 측정이 어렵고 군사동맹이라 깨지기도 어려우니 잠시 논외로 하자. 그보다, 우리나라가 어쨌든 파병을 하긴 했으니 그렇게 강조하던 경제적 실익을 얻었는지 확인해봐야하지 않겠는가. 획득한 국익이 있다손 치더라도,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과정에서 소요된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아픔은 빼고도 남는 장사여야 했다.
먼저 전후복구 파트이다. 2003년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전후복구 사업자를 선정했다. 당시 미 행정부는 미국 내 소수의 대기업에게만 입찰 특혜를 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이권이 걸린 이라크 석유산업 통제권은 누구에게 갔을까. 한국이 밥숟가락이라도 한 술 떴을까.
전쟁으로 새로이 들어선 이라크 정부는 한국에게 이라크 유전을 주긴 커녕, 입찰에 참여할 기회 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석유공사는 이라크 중앙정부의 유전개발 입찰에 참여하지 못했다. 입찰 자격 사전심사등록에서부터 탈락했다. 이라크 내의 알짜 유전은 선진국의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점령했다. 메이저와의 대결에서 싸움이 되지 않는 한국 석유회사들은 쿠르드 자치정부와 계약을 맺었지만, 이라크 중앙정부는 쿠르드 정부와 우리가 맺은 계약을 승인해주지 않았다. 이라크 중앙정부와 쿠르드 자치정부 간의 오랜 갈등 속에서, 한국은 갈피를 잃었다. 쿠르드 유전개발 참여로 오히려 한국과 이라크 중앙정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평가가 대세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라크 쿠르드 지역 유전개발사업은 정권이 바뀐 다음 새롭게 들어선 대통령의 '자원외교 1호' 아이콘으로 등극하게 된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