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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Jul 15. 2024

창당후 신중국 출범까지 중공의 토지책략(2)

중국부동산공부(21)-중공의 토지혁명전쟁과 운동

항일전쟁 시기(1937~1945.8)     

1931년 ‘9·18 만주사변’ 이후에는 중일 민족 모순이 주요 모순으로 대두되었고, 1937년 7·7사변[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과 이어서 같은 해에 발발한 8·13사변(일제의 상하이 폭격·침략 사건) 이후 전국적 성격의 항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張學良), 양후청(楊虎城)이 주도한 시안사변(西安事變) 이후 조성된 국공합작 일치항일 국면에서, 중공은 국내 형세와 주요 모순이 계급모순에서 민족모순으로 변했으므로 토지정책도 이에 따라 변해야 한다고 결정하고, 근거지(根据地)에서 지주에 대한 토지 몰수를 중지하고, 지주와 부농의 토지소유권을 보장해 주는 기초 하에 감조감식(减租减息) 정책으로 전환했다. 


중공의 이 같은 전략은 이미 1935년 와요보(瓦窑堡) 회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토지혁명과 민족혁명을 결합시킨다는 기본원칙을 결정하고, ‘부농에 대한 정책 변화에 관한 결정(关于改变对富农政策的决定)’을 작성·발표해, 부농정책(富农政策)을 새롭게 해석했다. 

1936년 7월, 중공중앙은 새로운 형세 변화에 근거해, 부농과 지주 그리고 농촌의 각종 경제적 착취관계에 대해 더욱 융통성 있고 관대한 정책을 채택한 ‘토지정책에 관한 지시(关于土地政策的指示)’를 발표했고, 1936년 9월 이후에는 지주의 토지 몰수를 중지한다고 선포했다.


1937년 8월에는 당의 통일전선정책을 관철·집행하기 위해 섬서(陕西) 북부의 뤄촨(洛川)에서 중공중앙 확대회의를 개최했고, 회의에서 ‘항일구국 10대 강령(抗日救国十大纲领)’을 통과시키고, 감조감식을 항일전쟁 시기에 농민토지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정책으로 정했다. 이후 1939년 상반기까지, 중공중앙은 감조감식의 기본방향과 원칙을 확정했다. 

1939~1941년, 중공의 6대 혁명근거지에서는 중공중앙의 토지정책 입법 정신에 근거해, 입법 형식을 통해 감조감식의 표준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감조감식정책은 한편으로는 지주에게 임대료(租)와 이자(息) 감면을 요구하고, 또 한편에서는 농민에게 임대료와 이자 납부를 요구해 지주와 부농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각 근거지마다 정황이 서로 달랐지만, 일반적으로, 전쟁 전의 세금액을 기준으로 해서 25% 삭감하는(二五减租) 방식과 연이율을 10% 이상 초과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 통용되었다.     



해방전쟁 시기(1945.8~1949.10)     

항일전쟁 승리 후, 제2차 국공내전 시기에는 감조감식 정도로는 토지소유를 원하는 광대한 농민군중의 절실한 요구를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해방구(解放区)에서 토지개혁운동을 실행하기로 결정하며, 다시 대지주와 부농의 토지를 몰수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이 시기의 토지정책은 5·4지시(五四指示)라 불리는 1946년 5월 4일 발표된 ‘감조 청산 및 토지문제에 관한 지시(关于清算减租及土地问题的指示)’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즉 5·4지시 이전까지는 감조감식정책을 계속 실행했으나, 5·4 지시 이후에는 감조감식에서 경자유전정책으로 전환했다.


다음 단계로, 1947년 7~9월까지 시바이포(西柏坡)에서 개최된 ‘전국토지회의’와 ‘중국토지법 대강(中国土地法大纲)’의 제정 이후, 토지에 대한 철저한 평균분배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반봉건적 토지개혁 강령으로, 기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주의 토지 및 기타 재산을 몰수한다. 부농의 과다한 토지와 재산을 징수한다. 토지제도 개혁 이전의 향촌의 일체의 채무를 폐지한다. 경자유전의 토지제도를 시행한다. 공상업자(工商业者)의 재산 및 그 합법 경영을 보호한다.”


이어서, 1949년 9월 29일, 중국 인민 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체회의에서 통과된 ‘공동강령(共同纲领)’에서는 봉건-반봉건 토지소유제를 점진적으로 농민의 토지소유제로 개변(改变)한다고 밝히고, 동시에 “이미 토지개혁을 실행한 모든 지구에서는 농민이 이미 획득한 토지소유권을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1946년 ‘5·4 지시’와 같은 토지개혁 관련 조치들을 제정·하달하면서 중공이 장악한 근거지와 해방구에서 토지혁명투쟁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것이 내전 승리를 위한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즉, 조상 대대로 꿈에서 바라던 토지를 분배받게 된 광대한 빈농과 고농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바로 홍군과 인민해방군이라는 사실을 적극 홍보, 전파했고, 그 결과 일본군과 국민당군과의 전쟁 수행 과정에서 농민 군중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토지혁명투쟁 추진 과정에서 중공이 견지해 온 주요 전략은 ‘쑤쿠(诉苦)운동’이었다. ‘쑤쿠’란 과거에 당한 고통[苦]을 고소[诉]한다는 뜻으로, 지주로 대표되는 구사회의 반동파(反动派) 지배계급이 노동인민에게 준 고통을 고소한다는 의미이다. ‘쑤쿠운동’은 제 2차 국공내전 당시에 중국인민해방군 내 부대 장병에 대한 계급 교육과 토지혁명 추진을 위한 군중발동(群衆发动)의 주요 수단으로 광범위하게 운용되었다.

이는 중공이 견지해 온 기본전략으로서, 다수를 점하고 있는 피착취 계급에게 과거에 당한 고통을 회고하면서 현재의 행복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하는(忆苦思甜) 전략의 일환이었다.


947년 6월, 중공이 전국 범위의 전략적 진공을 결정한 후, 동북지구의 동북민주연군(东北民主联军)이 1947년 9월부터 추계공세(秋季攻势)와 동계공세(冬季攻势)를 통해서 그 다음 해인 1948년 3월까지 국민당 군대 20여만 명을 섬멸하고, 지린성 쓰핑(四平)과 안산(鞍山) 지구 내의 33개 도시를 접수했다. 중공은 추계공세와 동계공세 기간 중 서만주(西满)와 남만주(南满) 지구에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동력 확보를 위해 토지혁명투쟁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했고, 이때 채택한 수단이 쑤쿠(诉苦)운동이었다.                                  

쑤쿠(诉苦) 대회

인민해방군 지휘관과 전투원 대부분은 농민 출신이었고, 그들은 모두 지주계급으로부터 참혹한 수탈을 당한 경험과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쑤쿠(诉苦)운동은 이러한 감정을 토지개혁과 결합해 장병들의 각오를 제고시키는 가장 유효한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1947년 당시 동북지구 대병단(大兵团)의 작전 중 정치공작을 책임지고 있던 뤄롱환(罗荣桓)이 자신의 휘하 부대에서 시도한 쑤쿠운동 경험을 부대 전체로 확산 보급해 장병들의 전투 의지를 증강시켰고, 이후 이 경험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의해 인민해방군 전군으로 교육·보급되었다.


제7사단 내의 한 종대(纵队)에서 토지개혁 교육과 결합해, 고생 경험이 많고 원한이 깊은 병사, 그리고 원래 국민당 병사였으나 포로로 잡힌 후 전향한 병사들을 선정하고, 그들이 대오에 참가하기 전에 당한 고난을 동료 병사들 앞에서 발표하면서, 다른 병사들도 각자 자신의 고난을 회고하고 털어놓도록 부추겼다. 이어서, 분반 토론을 통해서 병사들 모두가 자신이 경험한 고생 경험을 털어놓고, 그 고생의 원인을 따져보도록 지도했다. 병사들은 한편으로 고생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장제스(蒋介石)와 국민당에게 진 원한과 빚을 갚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쑤쿠(诉苦)’ 방식은 연이은 승전에 따라 증가하는 국민당군 포로의 전향을 유도하기 위한 사상 교육에 특히 효과적이었다. 예를 들면, ‘쑤쿠’를 통해서 자신이 “국민당 군대에서 복무할 때에 본분을 몰랐고, 조상과 부모가 당한 수많은 고난과 천하의 가난한 인민들의 고난을 잊었다. 따라서 금후에는 필히 공산당과 함께 혁명을 하고, 전쟁에서 적을 사살해 공을 세우겠다”고 말하게 지도하며 전의를 다지게 하는 방식이었다.

쑤쿠(诉苦) 대회

중공은 부대 내 장병에 대한 사상 교육뿐만 아니라 농촌의 계급투쟁 현장에서도 쑤쿠(诉苦)운동을 이용했다. 예를 들면, 부대 주둔지에서 장(张)씨 성을 가진 한 소작농이 십년 넘게 입은 누더기 솜옷을 입고 있었다. 솜옷에 솜은 몇 겹 남아있지 않았고, 기운 자리 위에 또 덧대어 기운 것이었다. 


지도원이 그 누더기 솜옷을 들고 강습소에 와서 군중들과 문답 형식의 대화를 이끌었다.     


지도원: 이런 누더기 옷은 누가 입는가? 지주가 입는가?

군중: 이런 옷은 지주는 밑씻개용으로도 더럽다고 쓰지 않을 것이다. 소작농이 입는다.

지도원: 국민당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런 누더기 옷을 바꿔줄 수 있는가?

군중: 해줄 리 없다. 국민당은 지주와 부자들의 당이다.

지도원: 누가 가난한 사람들의 누더기 옷을 바꿔줄 수 있을까?

……     


이때, 군중 대오 중에 적극분자 한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도 이런 누더기를 입었고, 경찰에게 맞아서 눈이 멀었다고 말하며, 자기 부친이 당한 학대와 곤궁을 회상하며 상심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한다. 지도원은 그를 불러 내세우고 군중 앞에서 ‘쑤쿠(诉苦)’하게 한다.


뤄롱환은 이 같은 쑤쿠운동 경험을 1947년 8월 26일자 ≪동북일보(东北日报)≫에 “부대 교육의 방향”이란 제목의 사설로 발표하고, “쑤쿠운동은 군대 교육공작 분야에서 극히 중대한 의의를 지닌 창조”라고 제시하고, 이 같은 군중성 쑤쿠운동을 통해 죄악은 절대로 단독으로 또는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쑤쿠(诉苦)운동은 적극적인 장려와 보급을 통해서 동북인민해방군 각 부대에서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감조감식_减租减息 #쑤쿠_诉苦 #항일전쟁 #해방전쟁

https://youtu.be/8E3iqRlT40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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