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켜면 사진 한 장이 뜬다. 홍매화가 만발한 나무 아래 빛나는 은발, 돋보기 아래 달처럼 휜 눈과 살포시 다문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곱다. 세상 고생이란 모르고 곱게 늙은 할머니. 어쩌다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과 나누는 말은 늘 거의 같다.
“정말 고우세요.”
“예, 정말 곱지요?”
어머니를 땅에 묻고 돌아온 날, 그 사진을 핸드폰의 배경 화면으로 설정했다. 핸드폰을 보듬고 울어도 어머니는 잔잔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렇게 웃을 수만 없었던 바람 많았던 세월이 생각나서 더 서러웠다.
유년의 내게 어머니는 곱게 손질한 모시옷이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자장가 같은 옥색 치마였다. 다독다독 작은 성을 쌓으며 손수 가꾼 꽃밭에서 웃는 꽃이었다. 우리 일곱 남매가 앞마당 꽃처럼 올망졸망 자라던 어머니의 성에 광풍이 분 것은 내가 막 유년의 꽃길을 거쳐 나오던 때였다. 어머니의 성은 그리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공들여 다독이며 쌓아 올렸지만 한 그루 나무에 기댄 작은 담이었을 뿐, 그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나자 바람막이조차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 벌판에서 망연자실하던 때는 서른아홉. 바깥세상 모르던 안방마님이 그날부터 혼자 부대끼며 견뎌내야 했던 모진 바람과 그 속에서도 그치지 않던 절망보다 더 아득했던 간절한 바람. 그 바람을 미소 속에 묻어두고 어머니를 이리 곱게 남겨준 것은 어느 봄날이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께 남은 것은 일곱 자식과 땅 주인이 따로 있는 집 한 채뿐이었다. 부잣집 맏며느리라는 말이 무색했다. 부자는 아버지가 아니고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재산을 은닉한 채 납북되셨고 행방을 모르는 재산 대신 여섯 동생이 아버지께 남겨졌다. 아버지의 수입이 적지는 않았지만 열 명이 넘는 대가족이었다.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부자의 허울이 오히려 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들 가난하던 때였고 알뜰살뜰 식구들 건사하는 것은 그때의 여자들에겐 수고라고 할 일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직장을 옮기던 때, 살던 집마저 분가하는 동생에게 주어버리고 마련한 집이 땅 주인이 따로 있는 집이었다. 내 유년의 동화가 잠들어 있는 집. 그 집이 어머니의 치마폭을 바람막이 삼아 세워진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들보다 더 말썽을 피우는 막내 시동생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손가락에 끼었던 반지를 빼면서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좀 더 자란 다음에 들은 이야기였다.
그동안 어머니의 바람은 여섯이나 되는 시동생 시누이였고 일곱이나 되는 자식이었다. 그런 바람쯤이야 얼마든지 품을 수 있을 만큼 어머니의 치마폭은 넓었다. 그 속에서 몸집을 불린 바람들이 한 줄기씩 빠져나갔을 때 광풍이 몰아쳤고, 남은 것은 우리 일곱 남매였다. 오빠가 고작 열여덟, 셋째였던 나는 열셋, 막내는 돌도 지나지 않은 핏덩이였다. 빠져나간 바람들은 제 둥지 틀기에 바빴고, 세상의 바람은 치마폭에 품기에는 너무 거셌다. 곱던 모시가 푸새도 안 한 무명이 되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뒤주에 바닥이 보이고 찬장이 비어가는 것이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듯.
산다는 것은 억센 손에 목을 졸리는 일이다. 힘이 있으면 그 손을 밀쳐내고 일어서는 것이고 힘이 없으면 숨이 막히는 것이다.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려야 했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아버지가 증서 없이 돈을 빌려준 지인을 찾아갔다. 그 사람은 집에까지 찾아와서 통사정하던 아버지의 부하직원, “사모님, 사모님.”하며 굽실대던 사람이었다.
“아짐씨가 그라는 거 아니지라. 아짐씨가 나 돈 줬소?”
눈을 부라리며 악담을 퍼붓는 사람 앞에서 어머니는 ‘사모님’에서 ‘아짐씨’가 되었다. 그날, 늦은 밤까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
“느그 아부지는 동생들이나 어려운 사람 보면 당신 주머니를 다 털어부렀어야. 당신이 그라고 빨리 가실 줄 몰랐것제.”
“느그 아부지 참 대책 없는 양반이어야. 사람만 좋아갖고.”
혼잣말처럼 나직한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단발머리가 꼿꼿해지도록 소름이 돋았다. 그 말에 스민 아득한 그리움을 그 어린 나이에도 읽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 바람 속에 어머니는 하루하루 억센 아짐씨가 되어갔다. 사각거리던 긴치마 자락이 짧아졌고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어려운 경쟁을 뚫고 들어간 곳은 병원의 허드렛일을 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할머니까지 아홉 식구가 살아가기에는 늘 바닥이 보이는 아슬아슬함을 견뎌야 했다.
바깥바람에 부대끼고 돌아오면 집에는 작은 바람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우리 남매들은 제각각 어머니에게 바람이었다. 그것들을 하나씩 다독이고 품어야 하는 짧은 치마폭. 나는 그 치마폭이 찢기도록 요동치던 바람이었다. 감싸이지 않는 바람들을 추스르기 위해 흘렸을 눈물을 생각하면 지금도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아득해진다.
그러나 그 어떤 바람보다 어머니를 휘청이게 한 것은 미처 바람다운 몸짓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다섯 살 어린 나이로 먼저 아버지께 가버린 여섯째였다. 뒤늦게 뇌척수막염이라는 병명을 알았을 때 들었던 “조금만 일찍 병원에 갔더라면”하는 말은 어머니에겐 비수였으리라. 여섯 바람이 어머니의 치마폭을 떠나도 그 말은 끝내 떠나지도 잠들지도 않는 바람으로 남았다. 어린 동생의 맑고 곱던 눈이 내게도 지금까지 선한데 하물며 어머니에게랴.
어머니의 일은 늘 힘에 부치는 노동이었다. 그런다고 주저앉을 수 없었던 어머니. 퇴직하신 후 척추협착으로 1년 넘게 병상에 누웠던 것은 그 무리한 노동의 대가였다. 그렇게 힘든 나날을 지탱해준 것은 새벽기도회를 거르지 않는 신앙이었다. 어느 날, 성경을 덮고 쓰다듬으며 탄식하던 어머니의 표정을 난 잊을 수가 없다.
“느그 아부지는 어짜끄나. 세상에서는 베릴 것이 없는 양반인디 하나님 말씀을 모르고 가셔서.”
함께 살았던 날보다 혼자 살아온 날이 더 많아져 버린 때였다. 마지막 날 당신이 가길 원하는 천국에 아버지가 안 계실 것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어머니가 사는 날 동안 가장 큰 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후에라도 함께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하나님은 혹시 들어주셨을까.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을 딱 한 번 들은 적이 있다. 팔순을 넘긴 당신과 옛날이야기를 나누던 때였다. 무심한 듯 나직한 소리였다.
“느그 아부지 참 무책임한 양반이었어야. 일곱이나 되는디 나 혼자 다 어찌케 하라고.”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긴긴날 혼자 겪어야 했던 외로움과 아픔의 무게, 그리고 그 먹먹한 그리움이 바윗돌이 되어 가슴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가신 후 55년. 어머니가 긴 그리움에 매듭을 짓던 날, 어머니를 내 핸드폰에 모셨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제는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차마 내 손으로는 배경 화면 설정을 바꿀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바꿀 때가 되면 보내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발달한 기술은 이전 배경 화면까지 고스란히 새 핸드폰에 옮겨주었다. 앞으로도 내 핸드폰 배경 화면은 바뀌지 못할 것이다.
환한 미소 속에 감추어진 어머니의 바람은 이제 내 안에서 산다. 때론 서럽게 때론 아프게 나를 목메게 하면서. 살아생전 다 보듬어드리지 못했던 그 바람을 이제라도 보듬어드릴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