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새를 하며

by 김이경

면기에 밥을 담아 물을 부어놓고 외출했다. 돌아오니 밥알은 물속에서 몸을 풀고 그리 단단하지 못한 껍질을 벌린 채 흐느적거렸다. 옹골차던 알갱이가 반쯤 풀어져 마디처럼 꺾인 곳 군데군데 속살이 드러나 있다. 그것을 양푼을 받친 무명 주머니에 부어 담았다. 물은 무명 올 틈으로 새어 나가고 퉁퉁 부은 밥알만 주머니에 오롯이 담겼다. 주머니 입구를 뱅뱅 돌려 쥐고 주물렀다. 뽀얗고 진득한 것들이 무명 올 사이로 조금씩 밀려 나왔다.


요즘은 어지간한 옷에는 푸새하지 않는다. 빨아서 물기를 탈탈 털어 널면 금방 마르는 옷들도 많다. 그러나 모시나 마, 리넨 소재의 옷은 아무래도 그냥 입기가 꺼림칙하다. 주글주글한 것이 왠지 사람이 후줄근해 보인다. 푸새해야 하는데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분무기로 풀을 뿜어내는 제품들이 있어서 어지간한 것은 그것으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시 적삼은 어머니의 유품이다. 3년이 넘도록 옷장에 걸어놓기만 했지만 후줄근한 채로 걸어둘 수는 없다. 빨아서 푸새하고 다림질하는 데 풀 분무기로 뿌리는 것은 싫고, 그렇다고 손쉽게 풀을 끓여 쓰기도 내키지 않는다.


어머니는 큼지막한 무명 주머니에 물에 불린 밥을 담아 꾹꾹 주물러 진액을 뽑아냈다. 가끔 주머니를 벌려 물을 채워 넣고 다시 주무르기를 한참 하고 나면 밥알은 형체도 남지 않고 희끗한 찌꺼기만 남았다. 쌀알을 감싸고 있던 얇은 껍질들이었다. 그것도 함부로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따로 쓰는 곳이 있었다. 진액에 물을 섞어 풀을 먹인 후 풀을 좀 세게 먹여야 할 곳에 주머니를 문질렀다. 그렇게 마지막 풀기까지 된 풀로 쓰고 나서야 찌꺼기들을 버렸다.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그 모습을 따라 하듯 푸새를 한다. 알뜰하게 짜낸 진액에 물을 섞은 다음 밴 채에 한 번 걸러낸다. 껍질은 대부분 무명 주머니에 남지만 가는 올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온 것들이 있다.


“이런 것 안 걸러서 고운 모시옷에 풀 찌꺼기 묻으면 여편네 손끝 매시랍지 못하다고 광고하는 것이어야.”


어머니 말씀이 들리는 것 같다. 그런데 어디서나 그렇게 빠져나가는 것은 늘 있게 마련이다. 살다 보면 무명 올 사이를 빠져나오는 쌀 껍질 같은 것들은 세상 어디서나 닮은꼴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약삭빠름과 지혜로움의 사이에서 외줄 타기 한다고 할까. 그 때문에 자칫 덤터기라도 쓰지 않으려면 가끔은 삶을 체에 거르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쯤이야 어떠랴 하고 넘어갔던 찌꺼기 하나가 하필 앞섶에 떡하니 붙어있다면 누가 그를 보고 정갈하다 할까.


어머니가 하시듯 찌꺼기 하나라도 남을세라 공들여 걸러낸 풀물로 풀을 먹인다. 짜고 다시 주무르기를 서너 번 되풀이한다. 그래야 풀기가 골고루 고르게 스며든다. 마지막으로 깃과 앞섶, 소매 끝을 풀주머니로 문지르고 밟다듬이를 한다. 밟다듬이한 빨래는 빨랫줄에서도 함부로 나부대지 않는다. 참한 새색시처럼 새치름한 모시 적삼에서 올마다 하얀 바람이 인다. 어머니 숨소리인 듯, 다정한 속삭임인 듯. 그 바람 한 아름으로 한여름을 건널 수 있을 것 같다.


잘 마른 옷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 다시 한번 풀기를 다독인 뒤 꼼꼼하게 잔주름을 편다. 요즘은 다림질감에 물을 뿌리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손가락 몇 번 까닥이면 이슬이 내린 듯 고르게 물이 뿌려진다. 그렇지만 그런 기구가 없던 시절 푸새한 옷에 물을 뿌린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입안에 물을 가득 머금고 입술을 조절하여 분무기처럼 물을 뿜어내는데 골고루 이슬이 내리듯 뿌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세우細雨 뿜는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세우 뿜는 모습은 묘기였다. 모시나 삼베 적삼 같은 작은 옷만도 아니고 치마나 두루마기, 때로는 옥양목 이불 홑청을 다릴 때도 세우를 뿜었다. 그 널따란 홑청 한 군데도 굵은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무기로 뿌리다 보면 마지막에 자칫 굵은 방울이 떨어질 때도 있지만 할머니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세우로 뿜어냈다. 이불 홑청 끝까지 뿜어지는 세우는 아름다웠다. 금방이라도 무지개가 걸릴 것 같은, 마치 마술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건 어머니도 할머니만큼은 못하는 고난도의 묘기였는데 철없이 흉내 내려다 옷 앞섶만 몽땅 적셨다.


“세우 뿜을 때는 허리를 굽히면 안 되니라. 꼿꼿하게 서서 뿜을 곳을 잘 보고 뿜어야 하니라.”


할머니는 말씀처럼 그렇게 꼿꼿한 모습으로 사셨다. 쉽게 허리를 굽히지 않던 것은 양반가 아씨 마님의 체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우를 오래 뿜고 나면 숨이 가빠지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지금은 누구도 그런 묘기를 부리지 않아도 된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통 분무기는 아이들도 고난도의 묘기를 부리게 한다. 숨 가쁠 일도 없고 서툴러 빨래에 물을 엎지를 일도 없지만 그런 작은 물건이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는 잊고 산다. 그래서일까. 허리를 굽힐 곳과 굽히지 않을 곳도 분별하지 못하고 사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모시 적삼 한 벌을 푸새하는 동안 지난 세월이 오롯이 떠오른다. 러스킨이 말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라고.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라고.


할머니 가신 지는 벌써 40년, 어머니 가신 지도 3년이 넘었지만 남겨주신 모시 적삼 한 벌에 한여름을 채운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꼿꼿하고 정갈하던 품성도 채운다. 잊혀가는 기억들도 채운다.


반듯하게 다린 모시 적삼이 하얗게 반짝인다. 꼿꼿하게 자존심을 세운 하얀 모시옷을 한 번만 더 어머니께 입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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