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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경 Oct 22. 2023

  S학교는 특수학교다. 그리고 졸업한 장애인들을 보호하는 곳이기도 하다. 견학 겸 봉사활동을 갔다. 몇 군데 시설을 돌아본 후 안내자를 따라 ‘일굼터’에 갔다. ‘일굼터’는 경증의 장애인들이 자활을 위해 단순한 작업을 하는 곳이다. 셀로판지 봉투에 공책을 담은 후 접착제를 가리고 있는 흰 종이를 떼어 내고 봉투를 붙이는 일인데 제법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 한 여자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바닥에 떨어진 종잇조각을 마구 짓밟으며 소리를 질렀다. 얼굴은 앳돼 보여도 처녀티가 물씬 나는 아가씨였지만, 손님들이 왔다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달래 보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어눌한 말을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마침 준비한 과자 한 봉지를 주었더니 잠시 진정이 되었다. 그리곤 입을 함박만큼 벌리며 옆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순간, 아기천사가 강림한 것 같은 미소와 환한 얼굴. 방금 소리치며 화내던 사람은 어디 갔을까? 남자에게 과자를 넘치도록 한 움큼 주고는 자꾸 맞은편 여자를 가리키며 내게 뭐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남자 때문에 생긴 싸움인 것 같았다. 옆 사람들에게 신이 난 듯 과자를 나누어주면서도 끝내 맞은편 여자에게는 한 개도 주지 않고 심술 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혼자 따돌림당한 여자는 자기도 달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기도 그 남자에게 주어야 한다고 했다. 안내자가 그들을 토닥이며 자리에 앉혔지만 둘의 기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남자를 바라볼 때는 천사의 얼굴에 꿀이 떨어지는 눈빛, 상대 여자를 바라볼 때는 일그러진 얼굴과 독 오른 눈빛. 부끄러움 같은 감정의 자리는 그들에게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오래전, 내가 담임했던 선이도 그랬다. 열네 살 아이였지만 몸은 글래머였다. 학교에 자주 드나드는 서점의 총무가 오면 공부하다 말고 “이쁜 아저씨”를 외치며 뛰어나갔다. 옆 반의 미남 선생님을 기다리느라 쉬는 시간 내내 계단에 서 있기도 했다. 입가로 침이 흘러내려도 닦을 줄 모르고 눈만 반짝이던 아이는 순수한 자연의 욕망이었다. 선이의 몸이 가진 시간은 겨우 열네 살이 아니었다. S학교의 ‘일굼터’에 있는 여자들도 선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티 없이 맑은 미소, 그리고 송곳니를 드러낼 것 같은 벌거벗은 욕망은 자연이었다. 옷의 무게를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공책 몇 권을 봉투에 담아야 백 원을 받을 수 있는지, 그들의 자립을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설명하는 소리는 이미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한 장의 종이를 떼어 낼 때마다 살갗을 할퀴는 듯 따끔거렸다. 접착제에서 종이가 떨어지며 ‘지지지~’하고 나는 소리가 밀림의 으르렁거림 같다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었을까.


  ‘일굼터’를 나와서 생활실을 둘러보았다. 일행 누군가가 한 남자아이에게 과자를 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아빠”하고 매달렸다. 몸집이 작고 마른 남자아이였다. 그런데 그가 마흔 살도 넘은 사람이라는 안내자의 말을 듣는 순간 전율이 온몸을 훑어갔다. 과자를 주던 남자도 어정쩡하게 매달린 사람을 안지도 떼 내지도 못하고 멈칫했다. 잠시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는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그곳에 왔는데 그것이 삼십여 년 전, 그래서 사실은 정확한 나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누구든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매달린다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열 살 남짓한 아이였다. 거친 피부에서, 아이들처럼 보드랍지 않은 볼에서 세월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의 눈 속에는 세월이 담겨있지 않았다. 손에 과자봉지를 들고 아빠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매달려 환하게 웃는 눈에는 아주 작은 아이가 살고 있을 뿐이었다. 반가움으로 빛나는 눈빛. 나는 그 눈빛이 두려웠다. 주춤주춤 뒷걸음질로 방을 나와 돌아섰지만 저격용 레이저가 뒤통수를 노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부모에게 버려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부모를 잃어버린 것일 뿐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그 부모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가 모든 것을 정지시켜 버린 것이라고.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몸마저도 자라는 것을 멈추어 버린 사람. 그의 시간은 어디로 새 나가는 것일까? 어린이의 허울 밖으로 새어 버린 그의 시간은 다 어디 갔을까? 


  봉사활동 시간이 되자 몇 가지 과제가 주어졌다. 내가 맡은 일은 배 밭 풀베기였다. 낫질 한 번 해본 경험도 없었고 마음이 탈진한 상태였다. 날카로운 낫에 손가락이라도 베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낫은 무디고 풀은 들쭉날쭉 잘렸다. 고르지 못하게 석둑거릴 때 “아” “빠!” 음절로 도막 난 소리만 귀를 울렸다.


  원시의 시간에 묶여 자연으로 회귀해 버린 아이. 시간이 정지한 몸을 지니고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는 아이. 그들에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삶에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 시간이 있기는 한 것일까. 


  가끔은 한숨을 쉬다가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보니 옆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반도 못 했다. 그때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그런 소리 마. 그 사람들이 세상에서 젤 행복한지도 몰라. 뭔 걱정이 있겠냐고.”

  “하긴 그래.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 허구한 날 걱정근심보따리 매고 사는 내가 불쌍하지.”

  “맞아 맞아. 불쌍한 건 우리야. 그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를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니까.”


  목소리가 힘없고 자조적으로 들리는 것이 그들도 결코 맘이 편치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랬다. 그들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 어제와 내일이 없어도 오늘 즐겁고 행복하면 되는 그들에게 시간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장애인의 상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로는 잘한다. 그렇지만 마음속에서는 그들의 상태가 틀린 것이라며 어쭙잖은 동정과 안타까움이 발버둥 쳤다. 그들의 꾸밈없는 표정도, 그들에게 주어진 오늘뿐인 시간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벌거벗은 표정이 안쓰러웠고, 쌓이지 못하고 새어나가는 시간을 동정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들이 나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리다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며 그들과 나를 가르고 벽을 쌓고 있었다.


  그랬다. 내가 그들을 안쓰러워하고 동정한 것은 바로 내 안의 벽이었다. 접착제를 덮은 종이처럼 떼어 낼 수도 없고 낫으로 베어낼 수도 없는 벽. 그것이 알량한 동정심의 허울을 쓰고 내 안에서 요동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우월감에 도취된 것은 아니었을까. 허둥거리는 순간 낫이 손끝을 스쳤다. 뭔가 시원할 것 같았지만 베인 자리는 쓰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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