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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경 Oct 22. 2023

박명薄明의 시간

  저물녘 외곽순환도로를 달리다 보면 하늘의 두 얼굴을 만난다. 


  구름자락에 붙은 불이 하늘을 태운다. 때론 금빛으로 일렁이고, 때론 진홍의 피를 토하는 구름은 무녀의 옷자락이다. 그 열기 어디쯤 칠금령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불길 속에 태양은 하루 동안 묻혀온 풍진風塵을 사른다. 내일의 정결한 탄생을 준비하는 의식인 것일까. 해가 티 없는 불덩이로 붉은 잠자리를 펼 즈음 가슴에 그 불덩이를 보듬고 계양 IC를 지나야 한다.


  길이 동쪽으로 몸을 눕히면 바닷물이 쏟아지듯 파란 하늘이 내려온다. 순간 잔뜩 달아오르던 가슴이 날붙이에 베인 것 같다. 심장을 시간에 베이면 그렇게 짙푸른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푸른 피가 불덩이와 맞닿으면 튜바와 트럼펫이 제각각의 음색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담금질하는 대장간이다. 그때는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가하면 안 된다. 점점 짙어지는 남빛 하늘이 튜바의 묵직한 저음으로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박명薄命의 하늘은 숨 막힐 듯 파랗다. 그 시간을 blue hour라고만 하지 않고 magic hour라고 하는 까닭은 그 하늘 아래 서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짙푸른 하늘은 일렁임도 설렘도 없지만 노을보다 뜨겁고 바다보다 차갑다. 말 없는 말이고 소리 없는 함성이다. 상장喪章처럼 음울하다. 그러나 요람처럼 포근하다. 잠시 그 아래 멍하게 서 있어도 좋다. 그러면 하늘과 땅이 서로 손을 내미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가 누구의 가슴에 안기는지 그런 것은 묻지 않아도 된다. 아주 조금씩 다가서며 손과 손의 경계를 지우고, 어깨와 어깨의 경계를 지운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과 가슴마저 경계를 지운다. 등 뒤 붉은 하늘에 한 조각 정염마저 사그라질 때 박명은 조용한 합장을 한다. 하늘도 땅도 하나가 되는 어둠은 노을의 붉은 시간도, 박명의 푸른 시간도, 모두 감싸 안는다. 그때는 잠시 눈을 감고 함께 합장해야 한다. 


  나는 붉은 노을을 사랑한다. 그러나 푸른 노을, 박명을 더 사랑한다. 


  내 마지막 시간을 노을처럼 붉게 태우고 싶었다. 단풍의 붉은 아우성처럼 꽃답게 지고 싶었다. 그러나 박명의 하늘 아래 서면 자꾸만 어머니의 자궁이 생각난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그 시간이 숨 타는 여명이었다면 박명은 조용한 회귀의 시간이리라. 


  지금 나는 박명의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조금씩 손을 맞잡아 가는 박명의 몸짓처럼 안온한 몸짓으로 박모薄暮의 순간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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