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군복을 갓 벗은 남자는 아마도 많은 꿈을 꾸지 않았을까? 지금의 군대보다 살벌하고 억압적이었을 곳이 당시의 군대라고는 하지만 제대 후 마주한 현실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스물셋의 그는 제대의 기쁨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 당시 그의 마음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글이라는 형태로 옮겨 적을 수 없을 만한 충격과 슬픔이었을 것이다.
주말 부부였던 남자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며칠째 출근하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고 남자의 아버지를 찾아 헤맸다. 워낙 사이가 돈독했던 아버지의 형제들은 생업을 잠시 미뤄둔 채 불안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흔적을 쫓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깜깜한 어둠 속 짙게 깔린 무거운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기에 답답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야속하게도 잠시 미뤄 둔 생업으로 돌아가라 형제들을 떠밀었다.
지금처럼 수사 기술이 발달하고 CCTV가 곳곳에 있어도 사라진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은데, 20여 년 전의 기술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시간은 무책임하게 흐를 뿐이었고 어쩌면 가출 혹은 행방불명으로 남을 뻔했다. 하지만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 남자의 아버지는 가로등도 없던 산길 호수를 향한 타이어 자국 끝에서 발견됐다. 아마도 어두웠을 그곳을 홀로 달리던, 운전이 능숙하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는, 주말 부부를 시작하며 장만했다는 첫 차와 함께 꺼내어졌다. 까만 입을 벌려 그를 삼켜버린 호수에서 새까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땅 위로 올라왔다.
남자는 그렇게 젊은, 아니 조금은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됐다.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던 날, 당장 성인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술집에서 신분증을 당당하게 들이미는 순간 굉장한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고, 19살에서 20살이 되는데 단 1초면 충분했다. 어른이 되는 데는 큰 노력도 댓가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스물셋의 남자와 두 살 어린 여동생은 숫자로만 성인이 되었을 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른이 되면 세상의 중심이 될 거라 다짐했지만, 당장 다니고 있는 학교의 남은 등록금조차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말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난감한 건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버텨야 했다. 엄마였고 어른이었으니까. 떠나버린 남편이 그립고 어쩌면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정의 소모 따위보다 당장 남은 자식 둘을 책임져야 함이 더 급했다. 키는 훌쩍 자라 울고 있는 엄마를 다독여 줄 만큼 장성한 자식들이었지만 아마도 그녀의 눈에는 초등학교 입학식 날 콧물을 들이키던 꼬맹이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남자의 어머니는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했다. 워낙 손맛이 좋았던 터라 수입은 나쁘지 않았다. 동네에 아는 사람도 많았고 사람 대하는 것에 능숙했던지라 오히려 재능을 찾았다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삶은 그녀를 또 흔들어댔다. 남편의 사망 보험금을 몰아넣은 주식은 가게 보증금까지 잡아끌고 폭락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가 공부에 관심이 없던 건 지금을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취업하려면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며 떠밀려 지원한 학교가 2년짜리 전문대였기에 차라리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지금의 상황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착착 맞물렸다. 대학을 빠르게 졸업한 남자는 바로 취업해야만 했다.
떠나간 아버지가 도와주기라도 하셨을까, 취업은 다행히 빨리 성공했다. 또래보다 가장이 빨리 된 것처럼 취업도 빨랐다. 그렇게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서글서글한 성격 덕에 사람들과 지냄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문제는 잦은 출장이었다.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년, 지방으로 해외로 출장을 다녔다. 아무리 둥근 성격이라 한들 낯선 나라에서 몇 달 혹은 그 이상 지내는 게 편하기만 했을까 싶지만, 아무래도 넉넉한 출장비에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며 몸을 불려 가는 숫자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나 안도감이 들었을 것이다.
워낙 사람과 술을 즐기는 남자였기에 처음 겪는 장기간의 일본 출장은 창가에 소복소복 쌓이는 눈처럼 고요하고 쓸쓸했을지도 모르겠다. 평소 일본어를 공부했던 것도 아니고 일본에 대해서라면 엑스 재팬 정도나 알았을까? 현지 직원들과 손짓발짓에 전자사전을 두들겨 대는 것으로 업무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사람과의 소통에는 한계는 있었다. 이자카야 생맥주와 편의점에서 파는 달콤하고 짭짤한 도시락은 헛헛했던 남자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아 자주 찾게 되었다. 엄마가 싸 주신 반찬과 또 다른 의미로 그를 위로 해줬다.
중국 출장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나마 일본은 음식이 마음에 들었지만, 워낙 향토 음식이 취향이었던 남자는 향이 강한 중국 음식들에서 화장품 맛이 나는 것 같은 곤욕이었다. 달궈진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크게 떠올려 흰 쌀밥과 적당히 으깨 한 입 꿀꺽 삼키고 싶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외로움은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퇴근 후 야시장에서 먹는 칭따오와 꼬치만이 동네 포장마차에서 친구들과 먹던 맛과 같아 오늘도 수고했다고 그를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가족들이 그리워 한잔, 친구들이 보고 싶어 한잔, 살아생전 함께 잔을 기울이지 못했던 아버지가 그리워져 한잔, 한잔. 그렇게 한 잔씩 늘어 갔다.
집보다 바깥 생활이 더 많았던 남자는 정신 차리고 보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나는 얘가 이렇게 살이 찔 줄 몰랐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오히려 너무 말라 걱정이 될 정도라고 덧붙이신다.
큰 키에 28인치 날씬했던 허리는 어느새 34인치를 우습게 넘겼고 풍성했던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머리 라인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누가 봐도 배 나온 동네 아저씨의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빠는 개미 같아."
아홉 살 아이의 한마디 말은 어린 가장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남자의 삶을 잠시 멈춰 세웠다. 웅덩이에 비친 하늘처럼 남자를 꼭 닮은 얼굴의 아이. 그간의 세월을 인정받는 것 같아 목이 콱 막혔다. 열심히 살아온 남자를 작은 아이의 맑은 눈이 안아주는 것 같아 코끝이 시큰거렸다.
아이에게 위로받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행여 눈물이라도 흐를까 눈에 잔뜩 힘을 준다.
"아빠, 개미처럼 열심히 살고 있지?"
아이의 작은 몸을 커다란 자신의 품 안에 꽉 안으며 부드러운 냄새를 맡아본다.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 시간 따위 지금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아이가 자지러지며 웃는다.
"아빠는 개미처럼 머리 가슴 배만 있어."
마주 앉은 아내가 숨넘어갈 듯 웃으며 덧붙인다.
"얼마나 살이 쪘으면 목이 없어졌어?"
얄미운 두 손이 채 가리지 못한 아내의 목젖이 곰살맞다. 그래, 가족들의 웃는 얼굴을 봤으니 그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