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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Lee Apr 26. 2024

유치원 소풍날, 난 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저도 어린데요.

7살 유치원 꼬맹이 시절에 울먹이면서 나만 졸졸 쫓아다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나는 여자 아이들과 노는 게 재밌는데 딱히 나랑 무슨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내 주변을 계속 맴도니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혹시나 친구들이 그 애와 좋아하는 사이라고 놀릴까 봐 그것도 걱정이 됐고 말이다. 그 아이가 내 근처에 오면 나는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갔고 그래도 쫓아오면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짜증 나는 얼굴을 했다. 그러면 그 애는 내 옆에 안절부절못한 자세를 하고선 날 계속 쳐다보았다. 간식 시간에도 그 아이가 옆에 앉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웃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한, 훌쩍이며 불안해하는 그 애가 좀 그냥 그래서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서울대공원으로 소풍을 가는 날 아침, 엄마는 김밥을 싸시는 여느 때처럼, 주방 바닥에 신문지를 넓게 넓게 고 김밥에 들어갈 각종 재료들과 김밥을 돌돌 말 김밥발, 참기름을 바를 붓, 새벽에 따끈히 지으신 쌀밥을 담은  등을 그 위에 올리셨다. 재료들을 다듬고 볶느라 앞치마를 하셨던 그대로 털썩 바닥에 앉으셔서는 김밥을 꼭꼭 말기 시작하셨다. 김밥을 는 날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는데 그건 바로 간장과 참기름, 설탕에 볶아진 달달하고 고소한  쇠고기볶음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불고기 양념 맛인데 고기를 갓 지은 밥과 함께 국물까지 넣고 싹싹 비벼서 내어 주시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는 거다. 생각해 보니 김밥보다 쇠고기 비빔밥 먹을 생각에 나는 김밥 싸는 날을 매번 기다렸던 것 같다. 뱃속을 쇠고기로 든든히 채우고 엄마가 고이 말아주신 김밥 가방을 메고 룰루랄라 유치원으로 출발. 친구들과 감자도 캐고 재밌는 놀이도 하고 맛있는 김밥도 나눠먹을 생각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쇠고기김밥 @봄나들이 블로그


유치원에 도착하니 커다란 관광버스 한 대가 서 있었고 선생님들은 우리의 이름을 차례대로 부르며 줄을 세우셨다. 한 명씩 버스에 올랐고 나도 오른발을 올려 계단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그 남자아이의 어머니가 불쑥 내게 다가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녕, 벨라야. 그동안 네 얘기 많이 들었어. 다름이 아니고  우리 세형이가 소풍을 혼자 가기 싫다고 아침부터 계속 우는 거야, 그래서 아줌마가 부탁 하나 좀 할게. 세형이 얘길 들어보니 벨라 너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하더라고. 미안한데 오늘 소풍에 우리 세형이 좀 잘 챙겨줄 수 있겠니? 너무 고마워."

"네? 네..."

갑작스러운 부탁에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딱히 책임은 질 수 없는 대답이기도 했다. 이젠 소풍에서까지 얘랑 얽히는구나 생각하니 아직 차는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묵직한 돌이 가슴에 박히는 듯 속이 답답해졌다. 나는 저 아이를 위해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뭘 챙겨주라는 얘기실까. 그리고 그 아이는 왜 나랑 있으면 편하다고 하는 걸까. 나는 매번 그 아이를 피하거나 도망가기 일쑤였는데. 세형이가 본인 엄마에게 뭐라고 말씀드린 지는 모르겠지만 날 평소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버스에 오르니 선생님께서는 세형이와 나를 짝으로 앉혀 주셨다. 자리에 앉아 세형이의 표정을 살피니 정말 아까 울었었는지 아랫 속눈썹이 눈아랫부분에 바짝 붙어있었다. 울고 말라붙은 속눈썹. 근데 신기한 건 내가 옆에 타는 순간 싱글 생글 웃는 얼굴로 바뀌는 거다. 내 이 답답한 마음을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 하루 나는 쟤 돌보다가 소풍이고 뭐고 다 망치겠다는 생각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서울대공원에 도착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체험하고 사진도 찍고, 대망의 도시락 타임, 즐거운 점심시간이 돌아왔다. 점심시간만큼은 친한 여자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같이 먹으려 했는데 역시나 내 옆에는 그 애가 찰싹 붙어 앉는 거다. 다른 친구들은 친한 친구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깔깔거리도시락을 먹는데 나는 즐거워야 할 점심시간까지도 이 아이와 단둘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 체할 것 같았다. 도시락을 먹는 내내 조용히 김밥만 입에 욱여넣고 있는데 세형이의 얼굴은 천진한 미소와 함께 너무나도 밝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스치는 거다. '얘 혹시 날 자기 엄마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나도 그냥 얘랑 같은 7살인데, 왜 내가 엄마야? 그래서 저렇게 나를 보면 편안해하는 건가?' 더 우울해졌다. 김밥은 너무나 맛있었지만 그 외 그날 딱히 기억나는 장면은 없다. 세형이라는 올가미가 내겐 너무 버거웠으니까.


소풍을 마치고 유치원에 다시 버스가 도착했다. 창밖을 보니 엄마가 보였다. 나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 우리 엄마. 엄마 얼굴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엄마, 나 오늘 많이 힘들었어.'

옆을 보니 세형이 엄마도 세형이에게 손을 흔들고 계셨다. 밝은 아들 표정에 마음이 흡족하신 듯했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세형이 엄마가 내게로 다가오시더니 오늘 세형이 잘 챙겨줘서 진짜 고맙다며 연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 주셨다. 아들의 찰나 표정만으로 오늘 소풍에서 어떻게 지냈을지 세형이 엄마는 다 아셨나 보다. 엄마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소풍날의 모든 이야기를 해드렸다. 엄마는 세형이가 널 많이 좋아하고 의지하는 것 같다앞으로도 잘 지내라고 말씀해 주셨다. 추후에 유치원 졸업앨범을 보니 소풍 페이지에서의 내 옆에는 세형이가 계속 세트로 출연하고 있었다. 난 알 수 없는 묘한 표정, 세형이는 착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를 잘 챙겨줄걸 하는 생각이 든다. 남동생도 있으니 어떻게 해야 재밌게 노는 건지 잘 알고 있었으면서 왜 세형이는 불편하고 피하고만 싶었을까.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거나 같이 안 놀아준다고 바닥에 대자로 누워 생떼를 쓰는 아이도 아니었는데. 너무 착하고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순둥이었는데, 그저 날 졸졸 쫓아다니며 내 표정을 살피며 곁을 맴돌았을 뿐인데 따스한 한마디라도 해줄걸 싶다. 간식 때 너도 이거 먹어하면서 챙겨줬더라면 세형이의 불안한 마음이 더 빨리 잠재워졌을 텐데 왜 그런 넉넉한 마음은 쓰지 못했는지 미안하기도 하다.



자식을 낳고 기르다 보니 세형이 어머니의 마음이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간다. 엄마와 떨어져 낯선 공간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여린 아들이 먼 곳으로 소풍을 가야 한다니 얼마나 막막한 심정이셨을까. 그나마 세형이가 종종 이야기하던 어린 여자아이에게 자기 아들을 부탁하때의 그 마음은 얼마나 절박하셨던 걸까.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날의 벨라어느새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지난날 지금의 나보다도 어렸을 친구 어머니의 심정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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