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번만나 같이 놀았던 언니가 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 손을 잡고 그 언니네 놀러 간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후로는 그 언니를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데 딱 하루의 인연이었던 언니.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나보다 키가 조금 크고 파마머리를 했던 언니. 언니와 뭘 하며놀았는지생각도잘 나지 않는데 딱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언니의 손가락에 낀 반지였다. 그것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 색이 바뀐다는 마법의 반지말이다.
하지만 언니는 절대 나에게 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상대가 너무 간절히 원하면 더 들어주기 싫은청개구리 같은 심리 말이다. 언니는 진짜로반지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내게보여주지도 않으면서색이 변한다며나를계속 궁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 지금 빨간색으로 변했다."
"와, 지금은 초록색이네."
"우와, 이젠 검은색으로 바뀌었잖아."
색이 변하는 반지라니. 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신비의 반지를 언니가 갖고 있다니 진짜 너무너무 부러웠고 그보다도 그 반지의 실체가 어떤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언니, 반지 살짝만이라도 보여줘. 나 너무 궁금해."
"야, 안돼. 이건 나만 볼 수 있는 반지야."
"그럼 지금 무슨 색인지 1초만 보여줘. 더는 보여달라고 안 할게."
"안돼!"
언니는 너무 단호했다. 아까까지 나랑 재미있게 놀아놓고 왜 반지는 절대 안 보여준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아니 1초도 못 보여줄 정도로 그렇게 반지가 좋고 아까운가? 치이.
슬슬 기분이 상했다.
"됐어 나 안 봐."
"야, 뭘 안 봐. 우와, 지금 또 파란색으로 변했네? 히히."
삐진 척하면 반지의 일부라도 살짝 보여줄 줄 알았는데 언니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계속 놀리기만 해서속이 자꾸 상하는데 언니는 뭐가 좋은지 연신 반지를 한쪽 손으로 가린 채로 히히히 잘도 웃었다.나는 또다시 언니에게 반지 한 번만 제발좀 보여달라고 사정하고 애원하다 엄마가 이제 집에 가자는 말을 하셔서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서야 했다. 결국 반지의 색이 변하는 건 고사하고 반지코빼기도 못 봤다. 갑자기 반지는 왜 가지고 나와서 사람 속을 이렇게 뒤집어 놓나. 집으로 가는 길에나도 색이 변하는반지를 사달라고 엄마께 말씀드리고 싶었지만,쓸데없는거라고 하실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반지를 어떻게든 꼭 사고 싶어명절에 어른들께 받은 용돈을 가지고 우리 동네 문방구를 다 뒤지기 시작했다. 문방구마다 예쁘고 다양한 보석반지들이 많이 있었지만 색이 변한다고 쓰여있는 건 없었다. 문방구 아주머니께 여쭤 봐도 그런 건 안 판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럼 도대체 그 언니는 어디에서 신비반지를 산 걸까. 궁금하고 부럽고 답답한 마음에 속상함이 밀려와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나도 너무갖고 싶다고.
수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언니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던 거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했다. 너무나 갖고 싶었을 뿐 그런 반지가 없다는 것을꿈에도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언니는 내게 장난으로 색이 변하는 반지가 있다고이야기한 건데 내가 그 말을 너무나도 철석같이 믿었던 게 죄라면 죄였을까. 제발 좀 보여달라고 애걸복걸하니 언니는 너무나재밌었을 것이고 그러니 그렇게 신이 난 표정으로 웃었을 테지.반지의 색이 변할 리 없으니 당연히 보여줄 수도 없었던 건데 어쩜 일말의 의심도 하지 못했을까. 더욱 신기한 건 진실을 알고 나서도 언니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그런 반지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 컸다. 오히려 코끝이 좀 찡해왔다. 어릴 때 마법의 반지를 찾아 문방구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녀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서러움. 이후에 그런 반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상실감. 이 두개의 감정이 묘하게 교차하며 유사한 슬픔을자아냈다. 이래저래 마법 반지는 결코내 것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이 아프고 충격적이었다.
그 당시 엄마께 반지 이야기를 했다면 언니의 말이 거짓임을 더 빨리 알게 되었을 텐데 어쩐 일인지 나만 알고 끙끙댔다는 게 신기하다. 어쩌면 반지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있던 시간들을 나만홀로조용히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실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릴까 봐. 너무나 소중해서 입 밖으로도꺼낼수없는 은밀한비밀스러움에 내심행복했을수도 있겠지.
아주 나중에 체온에 따라 색이 변하는 반지가 나온 걸 본 적이 있다. 나도 호기심에 구입해서는 지난날의 억울함을 어느 정도 해소하면서예전 그 언니와의에피소드가 갑자기생각나피식 웃음이났다.언니의 아이디어대로 실제 비슷한 상품이 몇 년 후 정말 출시된 걸 보면, 나름 그때부터 언니가 사업가적인 기질이있었던것도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나 굴욕적이기도 한 기억이지만, 속았던 시간 동안 마법 세계를 동경하고 꿈꿀 수 있게 해 준 언니에게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다. 정말 어딘가에서 언니가 큰 주얼리 사업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는 않을지 참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