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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Lee May 03. 2024

동생과 어항을 깨부쉈다.

최악의 기억


"게임하고 싶다."

"그렇지? 나도 너무 하고 싶어.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엄마가 어디에 숨기신 지 알아야 꺼내서 몰래 할 텐데. 열심히 찾아보자."


손으로 들고 하는 게임기가 동생에게 선물로 들어온 날이 있었다. 상대 비행기를 쏴서 없애는 게임이었는데 정신을 쏙 빼놓도록 아주 재미나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하고 게임에만 심취해 있는 우리의 모습이 한심해 보였는지 엄마는 어느 날 게임기를 압수하셨고 어딘가에 꼭꼭 감추어 놓으셨다. 그러나 그런 것에 주눅 들 우리가 아니지. 그날은 마침 엄마가 백화점에 다녀온다 하셔서 우리에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확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오락에 중독된 남매는 숨겨진 게임기를 찾으러 집안 구석구석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몇십 분을 뒤지다 보니 어라, 엄마의 화장대 뒤쪽 창틀에 게임기가 얌전히 놓여있는 게 아닌가. 올레. 냉큼 집어 들고 동생에게 이것 보라고 누나가 찾아내지 않았느냐고 자랑 자랑을 하며 게임기를 동생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동생은 빨리 게임을 하자했고, 나는 켜줄 테니 기다리라며 게임기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엇, 근데 켜지질 않는다. 배터리가 없나? 배터리도 있는데 왜 안되지. 다시 빼서 제자리에 넣어봤지만 여전히 깜깜무소식이었다. 손으로 두드리면 충격으로 인해 띠리리 켜질 수도 있으니 마구 때려봤지만 반응이 전혀 없다. 동생의 눈치를 살피니 꽤 실망한 듯해 이제 누나로서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기를 꼭 살려서 엄마가 오시기 전까지 열심히 게임을 하느냐 아니면 다시 제자리에 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각자 할 일을 할 것이냐. 사실 동생  보다도 내가 더 게임을 하고 싶어 열심히 찾아낸 이유도 으니 그래, 게임기를 소파에 세게 던져보고 그래도 안되면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하자. 거실 소파 뒤에는 7-8마리의 잉어들이 대형 어항에서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는데 사건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되었다. 나는 게임기를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 소파를 향해 힘껏 던졌다. 제발 켜져라, 제발. 간절한 주문을 외우면서.


꽝.

쨍그랑.

쏴아아아아.


소파에 맞아야 할 게임기는 어항의 아랫부분에 정통했고 폭포수 같은 물이 뚫린 구멍에서 콸콸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만이면 낫겠지만 엄마가 한 마리에 십만 원 정도 주고 구입하신 잉어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우리 집 마루는 물바다, 생선 바다가 되었고 펄떡이는 잉어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비규환의 상황에 우리 남매는 할 말을 잃었고 동생은 무서워 울기 시작했다. 나도 당황해 울기 직전이었고 엄마에게 혼날 일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져만 갔다. 엄마 돌아오실 때가 다 되어가는 것 같아 시계를 올려다보니 피아노학원에 가야 할 시간이 다 돼간다. 피아노학원까지 빠졌다가는 엄마에게 더 혼날 것 같아 일단 피아노책을 가방에 챙기고 동생에게는 일단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그날 누나로서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다. 엄마가 오시면 누나 피아노학원에 갔다 하고 누가 어항을 깼냐고 물어보시면 네가 게임기를 던져 그렇게 된 거라고 하라 했다. 못된 누나다. 착한 동생은 엉엉 울면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피아노학원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 위에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깨진 어항과 잉어, 그리고 울고 있는 동생, 화가 나있는 엄마 얼굴로 가득 차 속이 갑갑해져 다.


띠링띠링.

피아노선생님이 레슨 도중 전화를 받으셨다. 수화기 너머로 어딘 많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 선생님은 엄마라며 날 바꿔주셨다.

"당장 집에 와."

엄마의 묵직한 목소리에 이제 난 죽었다란 세 글자만 눈앞에 아른거렸고 겁이 나 손발이 덜덜 떨렸다. 집에 가는 길은 왜 이리도 짧은지 5분도 안돼 도착했고 엘리베이터에 내리는 순간,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는 상기되어 벌건 얼굴을 하고 계셨다. 곧이어 '지금 집을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피아노학원에 가게 되더냐'며 극대노 하셨다. 학원까지 빠지면 더 날까 봐 간 건데 내 예상이 한참 빗나가버렸다. 엄마에게 끌려 집으로 들어가니 울고 있는 동생이 보였다. 이미 한차례 엄마께 크게 꾸지람을 들은 듯했다. 나 대신 자기가 어항을 깬 거라고 했을 불쌍하고 가여운 내 동생. 혼자서 엄마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무서웠니. 난 널 지켜주지 못한 아주 나쁜 누나야. 누나를 절대 용서하지 말거라.


엄마는 대야와 뜰채를 주시면서 마룻바닥에 죽어있는 잉어들을 모두 담으라고 하셨다. 나는 무서워서 못하겠다며 자지러지게 울었고 엄마도 덜덜 엉엉 우셨다. 엄마어찌 못하겠으니 알아서 하라신다. 내 죄니 어쩌겠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미 숨을 거둔 가여운 잉어들을 하나씩 하나씩 뜰채로 떠서 대야에 담았다. 장식장 뒤로도 미끄러져 들어간 잉어는 내가 손을 뻗어봤지만 어린이의 팔길이로는 닿지 않는 길이었다. 엄마는 장식장을 옆으로 살짝 밀어 틈을 내주셨고 나는 그 틈으로 들어가 잉어를 잡아 올렸다. 죽은 값비싼 잉어들이 불쌍했고 울고 있는 엄마, 동생에게도 너무 미안했다. 서럽고 속상하고 복잡한 마음에 눈물이 마르질 않았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아랫집에서 인터폰이 왔다.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는데 무슨 일이 있냐고. 엄마는 어항이 깨졌는데 모두 보상해 드리겠다며 거듭 사과를 하셨다. 에효. 이젠 아랫집까지도 피해를 줬구나. 엄마는 아빠에게 전화를 거셨고 집이 난장판이 되었으니 빨리 와달라며 또 엉엉 우셨다.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내가 너무 미웠고 아빠가 오시고 난 이후의 일은 신기하게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일생일대 최고의 대형사고를 친 그날의 일로 엄마는 충격을 크게 받으셨고 사실 나와 동생도 큰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 특히 엄마는 그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절대 어항을 집에 들여놓지 않으신다. 물고기의 '물'자만 얘기해도 손사래를 치신다. 이 일은 친인척에게도 괴담처럼 퍼져가 나를 만나는 어르신들마다 그날 일을 웃으며 이야기하시곤 했다. 난 집안에서 엉뚱하고, 커서 아주 큰 일을 할 인물이라며 유명해졌고 나는 진짜 그런가 하고 내심 좋아하는 바보였다.


아무튼 크나큰 폭풍이 지나가고 다시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다. 지금 생각해 왜 게임기를 어항 근처 소파에 던져야만 했는지 이해가 안 다. 무심코 저지른 행동이 이렇게 엄청난 사고를 수 있다는 크나큰 교훈이 내 인생에 꼭 필요했나 보다. 그래서 하늘에서 경고를 주신건지도. 그날 이후로 나는 꽤나 조심스러운 아이가 되었고 돌다리도 두드려보라는 말을 깊이 새기며 살게 되었다. 조심, 그리고 신중하라. 


해묵은 나의 질하고도 어이없는 비밀을 이렇게 한낱 우스운 추억의 글로 풀어내다니 이게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그때의 우리 가족과 잉어, 그리고 아랫집에 사셨던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은 꼭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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