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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Lee May 10. 2024

이건 색깔이 변하는 마법의 반지야, 너도 볼래?

나도 보여줘, 제발!!!

딱 한번 만나 같이 놀았던 언니가 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 손을 잡고 그 언니네 놀러 간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후로는 그 언니를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데 딱 하루의 인연이었던 언니.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나보다 키가 조금 크고 파마머리를 했던 언니. 언니와 뭘 하며 놀았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데 딱 한 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언니의 손가락에 낀 반지였다. 그것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 색이 바뀐다는 마법의 반지 말이다.


하지만 언니는 절대 나에게 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상대가 너무 간절히 원하면 더 들어주기  청개구리 같은 심리 말이다. 언니는 진짜로 반지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내게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색이 변한다며 나를 계속 궁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 지금 빨간색으로 변했다."

"와, 지금은 초록색이네."

"우와, 이젠 검은색으로 바뀌었잖아."

색이 변하는 반지라니. 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신비의 반지를 언니가 갖고 있다니 진짜 너무너무 부러웠고 그보다도 그 반지의 실체가 어떤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언니, 반지 살짝만이라도 보여줘. 나 너무 궁금해."

"야, 안돼. 이건 나만 볼 수 있는 반지야."

"그럼 지금 무슨 색인지 1초만 보여줘. 더는 보여달라고 안 할게."

"안돼!"

언니는 너무 단호했다. 아까까지 나랑 재미있게 놀아놓고 왜 반지는 절대 안 보여준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아니 1초도 못 보여줄 정도로 그렇게 반지가 좋고 아까운가? 치이.


슬슬 기분이 상했다.

"됐어 나 안 봐."

"야, 뭘 안 봐. 우와, 지금 또 파란색으로 변했네? 히히."

삐진 척하면 반지의 일부라도 살짝 보여줄 줄 알았는데 언니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계속 놀리기만 해서 속이 자꾸 상하는데 언니는 뭐가 좋은지 연신 반지를 한쪽 손으로 가린 로 히히히 잘도 웃었다. 나는 또다시 언니에게 반지 한 번만 제발 좀 보여달라고 사정하고 애원하다 엄마가 이제 집에 가자는 말을 하셔서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서야 했다. 결국 반지의 색이 변하는 건 고사하고 반지 코빼기도 못 봤다. 갑자기 반지는 왜 가지나와서 사람 속을 이렇게 뒤집어 놓나. 집으로 가는 길에 나도 색이 변하는 반지를 사달라고 엄마께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거라고 하실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반지를 어떻게든 꼭 사고 싶어 명절에 어른들께 받은 용돈을 가지고 우리 동네 문방구를 다 뒤지기 시작했다. 문방구마다 예쁘고 다양한 보석반지들이 많이 있었지만 색이 변한다고 쓰여있는 건 없었다. 문방구 아주머니께 여쭤 봐도 그런 건 안 판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럼 도대체 그 언니는 어디에서 신비반지를 산 걸까. 궁금하고 부럽고 답답한 마음에 속상함이 밀려와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나도 너무 갖고 싶다고.




수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언니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던 거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했다. 너무나 갖고 싶었을 뿐 그런 반지가 없다는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언니는 내게 장난으로 색이 변하는 반지가 있다 이야기한 건데 내가 그 말을 너무나도 철석같이 믿었던 게 죄라면 죄였을까. 제발 좀 보여달라고 애걸복걸하니 언니는 너무나 재밌었을 것이고 그러니 그렇게 신이 난 표정으로 웃었을 테지. 반지의 색이 변할 리 없으니 당연히 보여줄 수도 없었던 건데 어쩜 일말의 의심도 하지 못했까. 더욱 신기한 건 진실을 알고 나서도 언니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그런 반지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 컸다. 오히려 코끝이 좀 찡해왔다. 어릴 때 마법의 반지를 찾아 문방구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서러움. 이후에 그런 반지가 세상에 존재지 않는다는 상실감.  두 개의 감정이 묘하게 교차하며 유사한 슬픔을 자아냈다. 이래저래 마법 반지는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이 아프고 충격적이었다.


그 당시 엄마께 반지 이야기를 했다언니의 말이 거짓임을 더 빨리 알게 되었을 텐데 어쩐 일인지 나만 알고 끙끙댔다는 게 신기하다. 어쩌면 반지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던 시간들을 나만 홀로 조용히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실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릴까 봐. 너무나 소중해서 입 밖으로도 꺼낼  없는 은밀한 비밀스러움에 내심 행복했을 수도 있겠지.


아주 나중에 체온에 따라 색이 변하는 반지가 나온 걸 본 적이 있다. 나도 호기심에 구입해서는 지난날의 억울함을 어느 정도 해소하면서 예전 그 언니와의 에피소드가 갑자기 생각 피식 웃음이 다. 언니의 아이디어대로 실제 비슷한 상품이 몇 년 후 정말 출시된 걸 보면, 나름 그때부터 언니가 사업가적인 기질이 있었던 것도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나 굴욕적이기도 한 기억이지만, 속았던 시간 동안 마법 세계를 동경하고 꿈꿀 수 있게 해 준 언니에게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다. 정말 어딘가에서 언니가 큰 주얼리 사업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는 않을지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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