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라Lee Jan 01. 2024

하늘만 허락한 사랑

떠난 내 친구 H를 그리워하며...

"은하야, 잘 지내?"

"어, 난 잘 지내."

"춥지는 않고? 너 추위 많이 탔었잖아."

"걱정 마, 여긴 항상 따뜻하더라."

"많이 보고 싶은데 요새는 왜 나한테 안 와?"

"너 많이 바쁜 것 같아서...

 오늘 밤에는 오랜만에 놀러 갈게, 이따 만나!"


이렇게 너와 어제일처럼 정말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

네가 떠난 뒤 난 육아와 살림에 치여 정신없이 살았던 것 같아, 정말 미안해...


글을 쓰려고 자리를 잡고 으니 11년 전의 일이 문득 떠오르더라. 우리의 20년 우정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하고 말이야. 그때 우리 참 많은 추억을 쌓았던 것 같아. 너희 집에 놀러 가서 비디오 보면서 과자 먹다 잠든 일, 같이 수학 학원 다녔던 일, 좋아하는 연예인 잡지 사서 서로 자기 연예인이 최고라며 자랑하던 일, 함께 교환일기 쓰던 일, 누가 너무 좋다며 연애 상담하던 일 모두 다 너와 함께였더라. 학원 콘서트에서 내가 노래 부른다고 네가 꽃다발 한아름 들고 와 축하해 주고, 내가 결혼할 때 유학 중이라 미안하다며 누구보다 따뜻한 말로 잘 살라며 응원해 줬잖아. 네 축복된 말 덕분에 나 지금까지 정말 잘 살고 있단다, 정말 고마워. 내 10대와 20대는 은하 네가 함께이지 않았던 적이 없고, 아주 가끔 다툴 때도 있었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서로를 너무나 의지하고 아끼는 마음이 깊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화해도 정말 속전속결이었지. 삐졌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금세 입꼬리가 씰룩씰룩했으니 말이야. 베프도 이런 베프가 또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참 찰떡같은 사이였는데...


근데 왜 그렇게 빨리 갔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수많은 수다와 함께 나눠야 할 추억들이 산더미로 쌓였는데 너 혼자 훌쩍 떠나버리면 어떡해. 내가 너무 슬프고 아프잖아.






시아를 갖고 한 달쯤 지났을까 은하의 번호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은하의 남동생이라고 했다. 누나가 지금 위독한데 벨라를 계속 찾고 있으니 병원에 좀 와 줄 수 있냐는 거였다. 2년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고 그와 동시에 심장이 두근대며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왜 하필 너와 사소한 오해로 멀어져 있는 동안 네가 아프게 된 건지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고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은하를 보면 난 분명 정신을 놓고 엉엉 목놓아 울텐, 와르르 무너질 내 상황이 너무 무서웠고 뱃속의 시아는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마음이 불안하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임신 초기라 나의 이런 불안정한 심리 상태가 자칫 아기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너무 미웠고, 이 가혹한 상황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러나 나쁜 생각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고, 네가 잘 버티고 있으면 내가 조금만 안정기가 되면 바로 찾아가 보겠노라고 다짐하며 친구 남동생에게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고 미안함을 전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는 동창에게 연락이 왔다. 은하의 성당 장례미사에 같이 갈 수 있겠냐고. 

또르륵...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잘 견뎌낼 거라 생각했는데 넌 그날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찾았던 거니... 미안하다 은하야, 진짜 내가 너무너무 미안해.   너와 다투고 나서 바보같이 네가 먼저 연락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깟 자존심이 다 뭐라고. 이렇게 속 좁은 에게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어른스레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 난 그 손마저도 뿌리치고 널 슬프고 외롭게 만들었어. 난 이제 네 베프라고 말할 자격도 없어. 진짜 끔찍하게 최악이야!!!'

심한 입덧과 더불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널브러진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시던 엄마는 이러다가 정말 너와 아기 모두 위험하겠다며 장례미사는 참석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어리석 이기적인 결국 은하가 하늘로 가는 마지막 가는 길조차도 함께 해주지 못했다.





"푸하하, 은하야 이리 와봐! 이거 진짜 웃기다."

"..."

"야 이거 재밌다니까? 같이 보자, 아 빨리!"

"..."

자그맣고 하얀 피부의 은하길고 까만 생머리의 뒷모습만 보여줄 뿐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우린 고등학생이고 소풍 가는 관광버스 안이었는데 은하는 원래 내 옆자리면서 다른 친구 자리에 가서는 불러도 도통 대답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다가가서 툭툭 등을 두드려봤지만 여전히 냉랭함만 가득하다.


어, 근데 눈을 떠보니 그건 꿈이었나 보다. 은하가 떠나고 신기하리만치 한동안 반복해 꾸었던 이 장면과 분위기. 은하매번 내게 화가 난 듯 차가워 보였고, 그래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한 번도 날 봐주지 않았던 그 꿈.

'내가 많이 미안해, 은하야... 그리고 꿈 속이지만 내 앞에 다시 나타나줘서 반갑고 고마워...'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그 장면이 반복되려는 찰나, 이번에는 은하가 나를 돌아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맞잡았고 서로를 바라보며 오래전 그날, 우리의 참 다정했었던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 환하게 웃었다. 여전히 착한 친구 은하는 그동안  못 할 죄책감에 하루하루 눈물짓던 못난 나에게, 많은 말보다는 선한 웃음으로 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이해해 주었다. 비록 꿈이었지만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꾸었던 장면이 이렇게 생생한 걸 보면, 정말로 그날 밤 은하가 날 만나러 우리 집에 찾아와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날의 해후가 있은 뒤, 신기하게도 은하는 더 이상 내 꿈에 나타나 않았다.


'하늘만 허락한 사랑'이 수록된 엄정화 2집


은하와 나는 노래 부르기를 정말 좋아해서 1주일에 한두 번은 노래방에 갔다. 은하의 18번은 엄정화의 '하늘만 허락한 사랑'이었는데 노래할 때의 그 애달픈 눈빛이 아직도 에 참 하다. 그땐 이 노래가 은하의 목소리와 참 잘 어울린다고 멜로디가 예쁜 곡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젠 은하를 그리워하는 눈물버튼이 되어 버렸다.


'은하야... 우리  우정을 네가 하늘나라로 가고서야 비로소 다시 붙일 수 있게 되다니 어쩜 이런 애꿎은 운명이 다 있을까. 그래도  널 진심으로 사랑했어. 그리고 여전히 많이 미안하고 사무치게 보고 싶어. 은하야, 오늘밤엔 오랜만에 내 꿈 꼭 와줄래? 너랑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너무 많거든! 정말 며칠 밤을 꼴딱 새야 할지도 몰라!!!'


은하를 만나러 가는 설레는 오늘밤은 하늘도 기꺼이 허락해 줄 것 같다.


20대 시절 벨라와 은하의 스티커사진



우리를 위해서 흘려진 눈물 기억해
그만큼 소중히 아낄게 [엄정화 - 하늘만 허락한 사랑 가사 中]
이전 05화 카레라이스의 당근 퇴치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