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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Lee Feb 05. 2024

주부인 아내에게 '백수 같다' 외친 남편의 최후

여왕이 되고 싶어

띠띠띠띠.

1월의 평화로운 금요일 오후 4시 30분.

현관문을 여는 도어록 소리가 울린다. 신랑이 이른 퇴근을 했나 보다. 우리는 한창 메이플 시럽을 뿌린 달달팬케이크를 간식으로 냠냠 쩝쩝 먹고 있는 중이었다. 


"안녕, 나 왔다!" 


인사를 하고 주방을 쓰윽 지나치는 줄 알았는데 시선을 다시 나에게로 옮긴 신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을 뗀다.


"우와, 완전 백수 같다!"

"뭐? 누가? 내가?"

"어, 하하하"

"..."


딸아이는 등을 지고 있어 아빠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정면으로 신랑의 얼굴을 마주한 나는 목격했다. 백수 같다는 말을 건네며 한쪽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잔인한 미소를 말이다.


남편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급하게 몸을 일으켜 화장대 거울 앞에 선다. 한껏 올려 묶은 똥머리는 언제 헝클어진 건지 드라마 추노의 장혁을 의심케 했다. 생기를 잃은 허연 입술과 초점을 잃은 흐릿한 눈빛, 요새 입맛이 없어서 밥을 반공기도 못 먹었더니 볼살도 움푹 패어 전반적으로 핼쑥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때 얼굴을 한 번 쓰윽 보고는 다시 챙겨볼 시간이 없었구나. 아이 깨워서 아침 먹여 학교 보내고(1월에 다시 개학을 했다.) 이불 정리하고 벗어놓은 옷들 정리하고 먼지 털고 청소기 밀고 설거지하고 빨래 돌리고 건조하고 개고 현관 쓸고 신발 정리하고 강아지 쉬 패드 갈고 물 갈아주고 털 빗기고 간식 주고 유튜브로 교육 동영상 보고 애정하는 프로그램들을 챙겨 보고 나니 벌써 아이 하교할 시간이었다. 하교 전까지 10분 남짓 시간이 남아 소파에서 잠시 꿀잠을 잔 것 같다. 돌아온 아이와 이야기를 좀 나누 음료수를 먹이고 운동 학원에 보내 다시 40분 정도의 시간이 비었다. 책을 좀 읽다 보니 아이가 다시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네. 부랴부랴 배달앱을 열어 팬케이크를 주문하고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와 함께 간식타임을 즐기중이었는데 이렇게 날벼락같은 소리를 들을 줄이야.




나는 주부다. 돈은 벌어오지 않지만 집에서 바지런하게 살림하는 얌전한 주부다.

식욕이 별로 없고 요리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외식도 자주 지만 집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어서 국, 찌개, 간단한 반찬 정도는 만들어서 먹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아이의 육아에 있어서는 정말 내 영혼을 갈아서 키웠다고 할 정도로 많이 공부하고 노력하고 인내하며 보내온 시간들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오죽하면 신랑이 '시아 전문가'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로 아이의 작은 것 하나까지도 기억하고 정확하게 상태 진단을 내리는 꼼꼼한 엄마다. 집안 분위기를 따뜻하고 밝게 만들기 위해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거실, 주방, 안방, 아이방을 꾸민다. 핼러윈에는 가랜드를 창문에 달고 코스튬을 입혀 아이 친구들과 집에서 파티를 하고, 크리스마스에는 반짝반짝 트리장식을 한 뒤 캐럴을 틀어놓고 신나게 노래 부르며 춤을 춘다. 거실 통창 위에는 별 조명을 달아 반짝거리는 밤하늘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해 본다. 강아지를 키우다 보니 위생과 청결에 유독 신경을 많이 써서 매일 쓸고 닦으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 없이 깔끔하게 지내려고 한다. 아이가 성장할 때 나도 같이 성장하며 도움을 주고 싶어 글도 쓰고 책도 읽고 각종 교육채널을 보며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핼러윈 & 크리스마스 장식


이 모든 것들은 그냥 쉽게 이루어진 것 같지만 가족들이 집에 들어왔을 때 편안한 분위기에서 힐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매일 집을 살펴보면서 다시 디자인하고 설계한 결과물들이다. 동선이 좋지 않으면 굳이 신랑에게 부탁하지 않고도 내가 밀고 끌면서 가구 배치도 다시 해보고, 간식과 라면을 손쉽게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스낵 선반을 직접 조립해서 '짜잔' 하고 모두를 놀라게 해주기도 한다. 신랑과 아이가 없을 때 이것저것 이벤트를 만들어놓고 집에 돌아왔을 때 깜짝 놀라게 해 주는 재미가 정말 쏠쏠하다. 게다가 다들 이벤트를 좋아해 주면 뿌듯함에 다음 스텝을 준비하는 나는야 계획형 'J ' 주부다.


뚝딱 조립한 스낵선반


이렇게 집에서 갖가지 수많은 것들을 총괄, 기획하고 있는 나에게 백수 같다니.

헝클어진 머리칼이 문제였던 것 같아 빗으로 머리를 곱게 빗고 고무줄로 다시 질끈 묶어 똥머리를 만들어본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이 문제였다면 좀 더 말끔한 새 트레이닝복을 내일 하나 장만해야겠다. 내가 너무 팬케이크를 우걱우걱 먹었나? 그렇다면 아무리 배가 고팠어도 조금 더 릴랙스 하며 우아하게 먹어야겠다.


아니,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하루종일 바쁘게 지내느라 미처 거울 볼 시간이 없었던 거고 거울 볼 시간이 있었다 한들 내 몸 단장할 정신은 없었던 거다. 나보다는 챙길 것들이 더 많았으니까. 주눅 들지 말자. 나는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 머리야 나갈 때 깔끔히 묶으면 되고 옷이야 나갈 때 예쁜 옷 꺼내 입으면 되는 거고, 밥이야 질질 흘리지 않고 먹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근데 생각해 보니 남편이 툭 던진 '백수' 같다는 한마디에 지금 소설 한 페이지는 나온 것 같네? 깊은 뜻 아니고 심오한 의미 아니었을 텐데 오늘도 나의 상상나라는 거침없이 촤르르 펼쳐져 버렸구나.




며칠 뒤 남편에게서 톡이 왔다.


남편과의 톡


회사에서 보너스를 받았는데 돈 보낸 걸로 까까(간식)를 사 먹으란다.

설마 백수 같다는 말에 요즘 내가 좀 뾰로통해 있던 걸 둔감한 신랑이 느낀 걸까? 자린고비 구두쇠 남편의 뜻밖의 큰 용돈 투척이라 급격히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예정에도 없던 감사 이모티콘을 3종이나 마구 쏘아댔다. 근데 정신 차리고 다시 보니 '감사의 뽑뽀'라니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캐릭터만 보고 잘못 누른 내 손가락 맴매. 저 정도로 보낼 건 아니었는데 너무 신났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했던가.(사실 싸운 것도 아닌 나 혼자만의 '북 치고 장구 치고'였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며 소설 한 바닥 써내려 간 설움들은 다 어디로 편의 한마디에 손바닥 뒤집듯 신나 하는 나는, 내가 봐도 웃긴 사람이다. 사실 요 며칠 괜히 억울해했는 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말이 별로 없는 무뚝뚝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돌아오는 생일에 손수 카드에 시아 잘 키워주고 우리 가족을 위해 애써줘서 고맙다고 적어서 건네주었던 그 진심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남편의 한마디에 울고 웃고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여자는 20대, 30대, 40대가 되어도 여전히 아름답고 싶은 소녀 감성이 있다는 것, 결코 그 마음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특히 날 사랑해 주는 사람 앞에서는 영원히 이 되고 싶은 여자들의 수줍고 고운 마음을 남편들이 소중히 아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그러니까 남편, 앞으로는 백수 말고 여왕, 공주 뭐 이런 단어로 대신해 줄래? 이번만 꾹 참는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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