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음 May 01. 2024

살아본 적이 없는 듯 살지 않기

나로서의 삶 살기

튀르키예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가 『신과의 인터뷰』라는 책에서 인간에게 가장 놀라운 점이 무엇인지 묻는다. 신은 네 가지를 대답한다.

“어린 시절이 지루하다고 서둘러 자라나길 바라고, 그러고는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잃어버리는 것.”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 그리하여 결국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못하는 것.”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결국 살아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는 것.”

큰 울림이 있는 글이라 오랜 시간 마음에 새기고 살고 있다. 특별히 내 영혼에 새겨진 문장은 네 번째 문장이다. 어릴 적,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가족을 위해 썼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 만큼 아팠다. 그녀가 우리에게 쏟아부었던 사랑만큼 죄책감의 크기도 컸다. 숭고한 사랑일지라도 그 안에 내가 없다면, 받는 사람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딸아이에게 부담되지 않는 사랑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은 나를 위해 몇 시간을 보냈는가?’를 질문하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혼자였을 때와는 다른 환경이고, 독박육 워킹맘의 시간을 헤쳐나가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쓴다. 죽음을 직면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만,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또렷해지고, 유한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며, 내 삶의 고유성에 집중하게 된다.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와는 달리,『100만 번 산 고양이』라는 그림책에는 100만 번이나 죽고 살아난 고양이가 등장한다. 고양이가 죽을 때마다 그를 아꼈던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고양이 자신은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고양이는 죽음이나 주인과의 이별이 슬프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 고양이는 왜 자기를 아껴 준 주인들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주인이 고양이를 좋아했다고 해서, 반드시 고양이가 주인을 좋아할 필요는 없지. 민우가 사랑이 좋아한다고 했는데, 사랑이는 민우 안 좋아하잖아.”

고양이는 자신이 다시 태어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슬프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삶의 유한함이 우리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     


딸아이의 현장체험학습 하루 전날, 평소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사랑아, 너는 어떤 과자를 좋아해? 네가 좋아하는 과자를 챙겨 가고 싶어서...”

우연히 보게 된 메시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을 물어보는 9살 소년의 순수한 마음에서, 과연 나는 사랑이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주인들은 자신이 주고 싶은 사랑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했던 사랑을 받지 못한 고양이는 자신이 사랑받는다고 느끼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녀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부모가 살지 못한 삶’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의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표현한 말이다. 고양이의 주인들처럼, 많은 부모가 자신의 기대와 가치관에 맞춰 사랑을 표현하고, 자녀들은 고양처럼 부모의 기대에 따라 움직인다. 자녀들은 자신의 욕구와 꿈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탐구할 자유마저 빼앗긴 채 살아간다. 자녀의 삶을 신경 쓰느라, 부모 또한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고, 결국 누구도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지 못하게 된다. 자아를 잃어버린 삶은 마치 살아본 적이 없는 것과 다름없다. 서로의 삶에 너무 깊이 개입하지 않고, 서로의 관심사나 선택을 존중하고 신뢰하며 지원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림책의 매 페이지는 "고양이는 OOO의 고양이였습니다."로 시작한다.

“저럴 거면 몰래 도망을 가지.”

무심한 듯한 딸아이의 말에 순간 웃음이 터졌지만, 이내 왜 고양이는 도망치지 않았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나에게도 고양이처럼 도망칠 노력을 하지 않고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성장을 막더라도 익숙한 일상이나 환경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잘못된 식습관과 운동 부족 같은 건강에 해로운 습관을 고수한다.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관계를 끊어내지 못한다. 저축을 비롯한 체계적인 재정 계획을 세우는 것을 회피한다. 대부분 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단지 하지 않기를 선택한 것들이다. 현재의 익숙함과 편안함으로 인해, 동기와 목적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도망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행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다. 고양이는 다시 태어날 삶이 있었기 때문에 도망칠 동기가 작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단 번의 기회밖에 없다. 같은 자리에 갇혀 있는 상태로 머물러 있기에는 인생이 너무 소중하다. 무턱대고 머리부터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약간 뒤흔드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겠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는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의 소유가 아닌 도둑고양이로 태어난다. 그리고 ‘처음으로’ 하얀 고양이에게 마음이 끌린다. 백만 명의 주인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마음을 내주지 않았던 고양이가, 하얀 고양이에게 마음이 끌린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100만 번이나 살았다는 자신의 자랑에도 꿈쩍하지 않는 하얀 고양이의 자신감과 높은 자존감에 끌렸던 것 같다. 100만 번을 누군가의 소유로 살아왔던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태도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하얀 고양이와 함께 한 시간은 고양이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었다. 새끼 고양이들을 키우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기쁨을 경험한다. 이 기쁨은 고양이 자신의 가치와 삶의 목적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이어진다.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고양이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고, 사랑과 관심을 주고받으면서 고양이는 자신의 소중함에 대해 깨닫게 된다. 삶이란 누군가의 필요와 고통에 응답할 때, 함께 성장하는 것 같다.


어느 날, 하얀 고양이가 세상을 먼저 떠나 버렸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100만 번이나 울었다. 어느 날, 고양이는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다시는 살아나지 않았다.

“뭐야? 다시 살아나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

딸아이의 휘둥그레진 눈에는 당혹감과 배신감이 뒤섞여 있다.

“그럼 지금까지 왜 계속 살아났던 거야?”

왠지 모를 배신감이 더 컸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그동안은 고양이가 진짜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했었나 봐. 그래서 진짜 살고 싶은 삶을 살기 위해 계속 살아났던 거지.”


황동규 시인은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에서 “우리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우리가 미리 심어 놓은 박수꾼이 있다.”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남의 박수를 받으려고 살다가, 결국 진정한 자신의 삶에서 멀어지게 된다고 말한다. 칭찬과 인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의 선택이 주변의 기대와 다를지라도,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자신에게 진실하게 사는 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삶이다. 고양이는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100만 한 번째의 삶이 필요치 않았다. 고양이는 횟수로는 100만 번 살았지만, 실제로는 단 한 번만 산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원하는 경험을 마음껏 누리며, 온전히 자신만의 색깔로 살아내기 위한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한다.


“엄마, 그런데 100만 번이나 살았는데, 고양이 이름이 없네? 백만이 어때?”

‘100만 번이 아니라 한 번 산 것과 다름없다고 방금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기억이 자리한 무릎 딱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