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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서 단단해지는 기분

by 이음

“경력이 없으시네요. 경력자를 찾고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아, 네... 그럴 수 있죠.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는 무슨. 속으로는 ‘처음부터 경력자 모집이라고 써 붙여 놓던가!’라며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나는 품격 있고 성숙한 여성이 아닌가. 억지 미소를 띠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교양 있는 척, 그렇게까지 절실하지는 않은 척. 부끄럽고 아쉬운 마음이 들킬까 봐, 얼른 편의점 문을 나섰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편의점 아르바이트 이력서를 쓰기까지 꽤 많은 시간을 망설였다. 학원이며 과외며 뼈 빠지게 뒷바라지해 준 아빠를 생각하니 죄스러웠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 마음이 어떨까? 걱정되고 허탈한 정도면 다행이지. 자식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는 현실에, 자책하며 무너져 내리진 않을까. 두려웠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초라한 내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와는 상관없을 거로 생각했던 현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내 능력과 경력이 필요한 일자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겨우 편의점 알바라니.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학벌, 간신히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연봉. 그마저도 이제 놓아야 한다니.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자존심이 구겨지다 못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강하다고 했던가. 자식 앞에 자존심이 웬 말인가. 내 새끼 입에 맛난 거 하나 더 넣어주겠다는 마음으로 패기 있게 지원했다. 그런데, 몇 번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망설였던 시간이 민망할 정도였다. ‘편의점 알바도 못 구한다니! 여태 뭘 하고 산 거지?’ 비참하고 당혹스러웠다. 절망, 원망, 실망. 뒤틀린 감정만 남았다.


‘망할!’ 왜 회사 이름과 직급이 내 능력인 줄 알았을까? 한심했다. 그동안 내 능력이라 믿었던 건 완전 빈 껍데기였다. 회사를 나와 보니, 대단치 않은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애를 쏟던 시간은 휴지 조각이 되었다. 지금껏 뭘 위해 그토록 열심히 살았던가. 발끝만 쳐다보며 기계적으로 걸었다.


편의점 문을 닫고 나온 세상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대낮인데도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가슴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소리가 사라진 거리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었다. ‘미용 기술을 배웠어야 했는데!’ 후회와 분노가 뒤섞여 엉뚱한 결론에 이르렀다. ‘평생 내 것으로 삼을 뭔가가 필요해.’ 순간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용접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되노?”

“에이, 뭐라 하노?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자기는 힘들어서 못 한다.”

“왜 못 하노? 안 해봤다 아이가. 두고 봐라! 작업복 입고 용접하는 여자랑 산다는 소리 듣게 해줄 테니까.”

그날 바로 용접 학원에 등록했다. 수업 시작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D-day. 퇴근한 남편에게 딸아이를 안기고, 나는 기대와 설렘을 안고 첫 수업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여자는 나 혼자였다. ‘남자들이여, 보라. 여기 신여성 등장이다!’ 어깨를 쭉 펴고 고개를 쳐들며 걸었다.


“죄송해요. 웬만하면 버텨 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환불 가능할까요?”

버틴다고 하기엔 두 시간도 채 안 되었지만, 사실 이미 한 시간 전에 포기했었다. 용접봉이 그렇게 무겁고 다루기 어려운 줄 알았더라면, 학원 등록은 물론, 처음부터 용접하겠다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학원에서도 주제 파악 못 하는 이상한 여자가 잠시 다녀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환불을 내심 반기는 것 같기도 했다. 한심하다는 말로는 그때의 자괴감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의욕만으로는 현실의 벽을 넘기 어려웠다. 초라하고 무능력한 내 모습을 마주하기가 두려워, 한동안 거울도 못 봤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만 같았다. 구석에 잔뜩 웅크린 채, 세상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곳엔 일할 곳이 조선소밖에 없어 보였고, 뭘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았다. 자신감은 바닥을 쳤고, 방향 없이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낯선 곳에서의 삶은 적응보다는 생존에 가까웠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지! 누가 이기나 해보자!’ 오기가 생겼다. ‘했던 일보다 안 해본 일이 훨씬 많잖아?’ 용기가 솟았다.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될지도 몰라.’ 희망이 싹텄다. ‘그까짓 것! 뒤돌아보지 말자!’ 몇 번의 작은 도전과 실패는 나를 움찔하게만 했던 건 아니었나 보다. 맷집이 세졌다. 편의점, 샌드위치 전문점, 약국, 학원... 계속 도전했다.


결국, 어린이집에서 하루 4시간씩 행정 업무를 돕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원하던 전문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도 아니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키우는 시간이었다. 딸아이가 조금 더 자라고, 지역 대학교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서른다섯 살에도 면접관들의 시선이 얼굴에 꽂힐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달라진 게 있다면, ‘떨어져도 다른 길은 있다.’라는 가벼운 마음가짐이었다.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내고, 지금은 사서로서 일하며 전문성을 쌓고 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거절당하는 일이 반복될 때마다, 나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진짜 내가 초라한 건 아니었다.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땅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무엇보다, 나무는 한 번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것은 시간의 일이다. 힘을 빼고, 보잘것없는 한 걸음을 내디뎌 보길. 그 작은 걸음이 숲을 이루는 시작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참, 평생 내 것으로 삼을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글쓰기가 내 삶의 기술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손끝으로 글자들을 흘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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