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13일 차
"어? 이거 작년에 없었는데 생겼네?"
"이번엔 뽀로로가 아니라 캐치티니핑이다!"
틀린 그림 찾는 것 마냥 그동안과 바뀐 조각상들을 보며 부지런히 썰매를 타는 곳으로 향했다. 우리의 작전은 일명 ' 치고 빠지기 작전'이다. 오픈시간에 맞추어 들어가서 사람들이 많아지기 전에 고급자 썰매는 여러 번 타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눈 놀이를 하다 점심을 매점 가서 간단히 먹고 집으로 오는 전략이다. 여러 번 왔기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군밤 굽기나 깡통열차 등 체험도 안 해도 되니 아이들끼리만 놀라고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올레! 오늘은 아침이 유독 추워서 인지, 아니면 커플들이 지난 연말에 무더기로 헤어졌는지 성인이 이용하는 고급자 코스엔 대기인원이 몇 명 없다. 오는 길에 보이던 유아용, 초급자용 썰매는 벌써부터 길이 50m는 서 있는 것 같던데, 이게 웬 횡재람. 이런 날은 아들만 보내면 안 된다. 사진만 찍던 엄마도, 핸드폰만 하던 아빠도 이 기회는 꼭 사수해야 한다. 남편에게 우리도 이용권 냈는데, 이럴 때 한 번 타보자며 귀찮아하는 남편 손을 끌고 얼른 대기줄로 달려갔다. 역시나 몇 분 기다리지 않고 썰매가 내 손에 쥐어졌다. 커다란 튜브를 직접 들고 가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뭐 한 번 탈 거니까 운동한다 생각하고 열심히 끌고 올라가기로 했다. 고급자는 경사가 가파르다 보니 올라가는 데고 숨이 턱턱 막힌다. (절대 운동부족이라서 그런 거 아님, 남들의 거친 숨소리도 분명히 들었음)
'한 번이니까 힘들어도 올라가는 거다. 사람이 없으니까 천천히 올라가도 되겠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운동선수로 빙의되어 커다란 타이어를 끌고 등산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엄마, 빨리 와!!"
"응. 기다려. 지금 엄청 빨리 가고 있는 거야."
아들아, 지금 엄마가 나 자신과의 싸움하는 거 안 보이니? 보채지 말고 얼른 와서 이 썰매 좀 들어주던가. 하여간 너도 연애하긴 글러먹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우리 집엔 남자가 셋이나 있는데 왜 나는 공주 대접은 커녕 매 번 짐꾼 혹은 시녀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전생에 공주 망나니여서 벌받는 건가??
드디어 우리 네 명이 쪼르륵 앉아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
"자 튜브 옆 손잡이 꼭 잡으셨죠? 내려가겠습니다. 출발!"
안내 소리와 함께 내가 앉아있던 바닥이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 바닥이 움직인다!!"
썰매장에도 신문물이 생겼다니!! 매 번 아르바이트생이 "끄영~차" 하며 나의 육중한 몸을 미느라 고생했는데 이제 전기의 힘으로 바닥을 기울여 나를 태운 썰매가 자연스럽게 내려가도록 해준다.
'역시 사람을 머리를 써야 해! 이렇게 하니 얼마나 좋아? 유후~ 더 빨라진 느낌이다~ 신난다!!"
오랜만에 타는 썰매 (매년 아이들만 태움)라 더욱 신이 나서 썰매장 끝까지 내려가려 몸을 더 숙였다. 그동안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몸무게가 빛을 발할 순간이다.
무게여, 속도를 UP 시켜라!!!
그때였다.
"저기요~ 저기요~~~!"
옆 라인 사람들과 안전요원들이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든다. 내 정면에서 여유롭게 내려오는 우리를 바라보던 직원은 나한테 달려오기까지 한다.
'뭐지? 내가 너무 소리 질렀나?' ' 튜브가 터진 건 아니겠지?'
뭔지 이유도 모르면서 벌써 사람들의 시선이 나한테 꽂힌 게 느껴져 민망하고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옆으로 터벅터벅 웃으며 걸어오는 남편이 보인다.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하고 입을 손으로 막은 채 남편에게 "왜?" 하며 입모양을 크게 오므렸다 편다.
"빨리 일어나. 뒤에 난리 났다."
바닥에 털썩 튜브사이에 끼인 듯이 앉아 있는 나에게 빨리 일어나라니! 손이라도 잡아주지 남편은 대답만 해주고는 내 뒤로 휘릭 사라져 버린다. 뭐지? 뒤를 왜 보래? 왜 뒤로 가?? 하며 남편이 가는 길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오, 마이갓!!! 등에 메고 있던 가방 속 물건들이 다 눈밭에서 뒹굴며 겨울놀이를 하고 있다.
'뭐야? 저거 내건데? 저기 있는 거 애들 보온병 아냐? 저게 왜 저깄지??'
하며 그제야 가방을 돌려 내 앞으로 가져와 보는데, 역시나 가방엔 아무것도 없다. 내려오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방이 열려있던 것이다.
"어머, 어떻게 해. 죄송해요. 빨리 주울게요."
안전요원은 묵묵부답이다. 웬 아줌마가 바이킹도 아닌데 혼자 소리를 지르면서 시선강탈하며 내려오더니 썰매장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이 상황이 꽤나 못마땅한 얼굴이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내 심장까지 파고든다. 위에서 자신의 차례만을 기다리며 한숨 쉬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서서히 창피함이 올라온다. 괜찮다. 그럴 수 있다. 한 번 보고 안 볼 사람이니 얼굴에 철판을 깔면 된다. 또 자기 암시를 걸며 아무렇지 않은 척 나름 빨리 물건들을 주워보지만, 그동안 찌워온 지방들 때문인지 몸에 슬로모션을 걸어 놓아서 마음만큼 움직여지지 않는다. 뒷짐 지고 선글라스 낀 채 폼 재고 있는 안전요원에게서 레이저가 나오기 시작했다. 속으로 얼마나 이 진상 아줌마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을까. 오늘도 한 겨울에 여름을 느끼는 구나. 또 온몸에 땀이 흐르고 있다.
'에잇. 40 넘어서 이게 웬 망신살이야. 그래도 그렇지. 안전요원 너도 쫌 그렇다? 계속 그렇게 똥 씹은 표정으로 쳐다보고만 있을 거니? 같이 주워야 이 상황이 빨리 끝나서 너도 편하지 않겠어? 20대인 팔팔한 네가 허리 숙이는 건 일도 아닐 건데.. 너도 참 센스 없다. 그래서 연애는 어떻게 하고, 결혼은 할 수 있겠니? 나중에 마누라 속 꽤나 썩이겠다. 안봐도 비디오지 뭐. 속으로 청승맞은 아줌마 욕 좀 그만하고 얼른 움직여!! 너도 내 나이 되어 봐라. 이렇게 썰매 타는 게 얼마나 큰 마음먹고 하는 건지 알게되는 순간 내가 존경스러워질 테니까.'
물건을 주우러 가족 모두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 짧은 순간에 내 머릿속은 미안했다가, 서운했다가, 창피했다가, 화가 났다를 반복하며 널뛰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썰매 타면 성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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