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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Feb 01. 2024

교과서는 죄가 없다.

방학 12일 차

"어머! 이게 뭐야?"

"아~그거? 영어 교과서야. 선생님이 다했다고 집에 가져가래."


오늘도 우리 1호는 참으로 해맑게 나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을 한다. 아들이라서일까, 아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빠 닮아서? (나쁜 건 무조건 배우자 DNA 탓으로 넘기는건 국룰^^) 그동안 읽었던 책은 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읽은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지금 너의 책상 위에 올려진 책 한 권을 보고 너무 놀라서 토끼눈을 한 채로 산책길에 우리 집 개가 싼 배변봉투를 쥐듯 교과서 끝을 조심히 들며 물어보잖니. 이 표정과 포즈를 보면 이 책의 정체가 뭔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12살인데 눈치껏 파악해야 정상 아닌가? 이렇게 당당하게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니 말문이 막힌다. 초등 5학년이 끝났으니 유치원과 학교생활만 해도 사회생활 8년 차인데 이 정도로 상황파악을 못해도 되는 건가? 그건 그렇고 대체 이 교과서는 뭐지??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지?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니 당혹스러운 이 상황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그대로 정지가 되었다.

미안하다,  교과서야.

후우... 심호흡을 크게 내쉬어 본다. 침착하자. 이건 화 낼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다치게 한 것도 아니고, 피해를 준 것도 아니다. 아이의 안전과 위법, 비윤리적 행동은 아니니 감정에 말려서 훈육하지 말자. 계속 나에게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별일 아니라고 주문을 걸어보지만 마음속의 화는 줄어들지 않는다. 안 되겠다. 진짜 이 아이를 이해하고 나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에게 SOS를 청해야겠다. 회사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테니 전화까지는 참고, 눈치 있게 문자를 보내야지. 난 찐 사회생활 19년 차니까.

'(사진 첨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야, 이게?'

'가방이 방수가 안되나? 물먹은 거야?'

'아드님은 교과서를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만..

그동안 교실에만 있다가 1년만에 집에 온 건디요.'

그렇지? 당신도 당신 아들이 이해가 안 되지? 이건 같은 남자라도 커버가 안 되는 게 맞지? 이 남자의 문자에 참고 있는 화를 분출해도 될 것 같은 희망이 보여 부글부글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이거 봐. 아빠도 놀라는 거 보이지?" 하며 보여주는 찰나에 연이어 날아온 답장이 급정거를 하게 만든다.

'나도 그랬어. 거기다 1호는 자기 물건을 잘 아끼지 않잖아. 나도 낙서 많이 했었어'

이 순간, 나는 확신했다. 1호의 센스(no sence)는 아빠를 닮은 게 분명하다고.




이번 주가 전국 초등학생이 있는 가정은 모두 가방검사를 하는 시기였는지 때마침 오늘 신문 기사 중  <디지털 교과서 이후 아이들이 잃게 될 것들>이라는 오피니언 기사가 있어 집중해서 글을 읽었다. 내년부터 초등학교 3, 4학년과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일부 과목에 디지털 교과서가 사용되는 것부터 시작되는 태블릿 PC 수업에 대한 우려가 담긴 글이었다.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40130/123307580/1


모든 일에 장단점이 있기에 이러한 정책이 나오는 데에는 이유와 장점이 있을 것이고, 정책사회부 차장인 글쓴이는 이런 주장에 반박하고자 경험과 자극, 기억과 추억을 강조했다. 평소 같았으면 기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디지털 감옥에 더 빨리 갇히게 될 아이들을 걱정했을 테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아이에게 시작한 불똥이 남편에게 갔다가 더 커져서 이은택 기자님에게 튄 것이다. 평소에 하지도 않는 로그인을 해서 '화나요'에 한 표를 던진다. 댓글을 다는 곳이 있었다면, '아이들이 1년 동안 사용한 교과서 보셨냐요? 생명도 없는 종이에게 이렇게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쉽지않은데, 이럴 바엔 그냥 태블릿으로 보는 게 지구라도 지킬 수 있어 좋지 않을까요.'라고 적으려 했다. (다행히 이 기사엔 댓글 쓰기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니 얼토당토 한 소리를 써놓은 진상으로 신고 들어갈 뻔;;) 기자님은 저 '화나요'의 한 표가 에듀테크 열사에 대한 분노로 이해하셨을 테지만, 다른 마음으로 클릭 한 내 마음은 이렇게 글로 표현해서인지 어느새 누그러져있었다.

'에휴.. 교과서 안쪽이라도 멀쩡한 게 어디냐. 그래도 수업은 다 했는지 답은 다 쓰여있네.' 하며 반쯤 포기 상태로 교과서를 훑어보곤 눈앞에 더 이상 안 보이게 치워버렸다. (다시는 눈에 띄지 말아라;;)




 문제의 교과서가 내 눈 앞에서 떠나자 아까 읽었던 기사글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돈다. 이렇게 글을 읽고 쓰는 행위가 사람에게 지식뿐만 아니라 감정과 소통으로도 얼마나 힘을 발휘하는지 교육부 장관님은 알고 계시는 걸까? 그게 디지털이어도 문제가 안된다고, 집에서도 부모님들이 아이에게 핸드폰을 쥐어주고,  컴퓨터도 가르치고 있지 않냐며 반박하신다고 하시면 저는 조용히 아래의 사진을 보여 드리며 말씀드리고 싶다.

"부총리님, 제가 지난 학기에 참관 수업을 갔었는데요, 때마침 크롬북으로 수업을 하시더라고요. 오늘의 글쓰기 주제를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면, 아이들이 타자로 글을 써서 올리는 국어시간이었어요. 아이들은 QR코드로 접속을 했고, 미리 생각해 둔 키워드 메모를 보며 글을 열심히 타이핑하더군요. 그리고 나서 전송을 하니까 선생님 뒤 전자 칠판에 차례대로 글 들이 전시되듯 보여져서 신기했어요. 아이들의 글쓰기가 끝나자 그중 몇 명의 글을 뽑아 글 쓴 친구가 나와 자신의 글을 읽으면 아이들은 모두 크롬북을 바라보며 친구의 발표에 댓글을 달아주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런 조용한 수업을 바라시는 게 맞나요? 진정 '디지털 디바이드’(디지털 기기 접근성의 차이) 완화방법'이 이게 최선일까요? 이번 계획대로 몇 개의 과목만 실행해보고 나서 학생, 교사, 학부모의 의견을 들어보시고 다시 한번 더 심사숙고하여 결정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종이교과서는 표지가 찢어져도 볼 수 있지만,
디지털 교과서는 화면이 깨지면 무조건 사야 하잖아요 ㅠ.ㅠ
저 1년에 6대는 사야 할 것 같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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